[왜냐면] 정다혜ㅣ고려대 법학연구원 연구원
“사무국장은 사무국 내에 피해자·증인 담당부를 둔다. 이 담당부는 소추부와 협의하여 증인, 재판소에 출석한 피해자, 그리고 그러한 증인이 행한 증언으로 인하여 위험에 처한 다른 자들을 위한 보호조치와 안전조치, 상담 및 기타 적절한 지원을 제공한다. 이 부에 성폭력 범죄와 관련된 정신장애(원문은 “트라우마”)를 포함하여 정신장애에 전문지식을 가진 직원을 포함한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 제43조 제6항에 규정되어 있는 사항(한국 정부 번역문)이다. 특히, 법정에 출석하여 증언을 하는 성범죄 피해자들이 증언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심리전문가들이 있다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우리나라 법원에 출석해 증언을 하는 피해자를 포함한 참고인들은 사실상 법정을 나서는 순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성폭력 범죄의 경우, 증인으로 출석한 피해자와 피고인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증인신문이 이루어질 동안 피고인을 퇴정하도록 한 뒤 별도의 대기실에서 대기하던 피해자를 법정으로 들어오도록 하거나, 피고인이 퇴정하지 않을 경우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에 가림막을 설치한다. 하지만 증인신문이 끝나면 증인은 마찬가지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법정을 나서게 된다.
통역인으로 참여했던 성폭력에 관한 재판 중에서 아직도 묵직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재판들이 몇 건 있다. 피해자는 타이(태국) 여성이었고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가 성폭행을 당했다. 피고인은 퇴정조치된 상태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들과 검사의 질문이 번갈아가며 이어졌고, 1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을 다시금 기억해내려 애쓰느라 증인은 답변 하나하나를 무척이나 어렵게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증인이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입술을 파르르 떨며, 더 이상 답변을 하고 싶지 않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제야 노트를 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증인의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자기 나라도 아닌 외국의 법정인데다, 통역인인 나와 자신을 제외하면 검사, 변호인, 판사 모두가 낯선 외국인 남성들이었고, 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앞에서 자신이 당한 사고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사건의 피해자는 같은 직장의 동료가 자신에게 저지른 성추행에 대해 고소를 한 경우였다. 이번에는 피고인과 증인 사이에 가림막이 세워졌다. 증인신문이 시작되었고, 증인은 꽤 침착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하지만 가림막 뒤에 있는 피고인을 의식해서인지, 피고인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거나 변호인과 대화를 하는 소리가 들리면 깜짝깜짝 놀라며 한동안 답변을 하지 못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가 결국은 숨이 가빠져 호흡곤란이 와서 증인신문이 잠시 중단되었다.
법원에 증인지원실이 마련되어 있기는 하나, 피해자가 외국인일 경우 의사소통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심리적인 지원보다는 재판 절차에 대한 설명만 해주는 것이 전부다. 또 증언이 끝난 뒤 법정만 나서면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는 피고인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등 신변보호가 보장되지 않을뿐더러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들이 재판 과정에서 입을 수 있는 2차 피해에 대한 아무런 보호조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다른 범죄와는 달리 피해자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성폭력 사건의 경우, 이미 범죄로 인해 큰 심리적 충격을 입은 피해자들이 어렵게 용기 내 출석한 법정에서 추가적인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심리전문가의 참여 등 더욱 세심한 지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