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성공회대 인문융합자율학부 교수
지난 17일에 교육부는 ‘대학 기본역량 진단’ 가결과를 발표했다. 전국 수백개 대학을 평가하여 근소한 점수 차이로 미선정 대학을 가려낸 것이다.
일견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 정원을 줄여야 하니 대학평가를 통해 퇴출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또한 모든 교과과정과 교과목의 체계화, 상담이나 진로안내 등 비교과 프로그램의 활성화 등 긍정적인 변화가 ‘대학 기본역량 진단’을 통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타율과 강제에 의한 교육동기 저하라는 부정적 효과가 있었음도 인정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대학들을 교육공학적 역량 강화라는 단일한 잣대로 평가한다는 점이다. 이로써 대학의 생명인 자율성이 훼손되고, 고유한 전통과 다양성이 급속도로 황폐해졌다. 마치 우세종만 살아남는 파괴된 생태계처럼 잣대를 통과한 대학만 살아남게 된다. 현재 교육부의 역량 기준으로 평가하면 세계적으로 이름난 명강의도 기준미달이 되는 경우가 속출할 것이다. 모든 강의와 학점이 공학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되고 환류 시스템을 완결해야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량 위주 교육도 하나의 교육 방법으로 유효하다. 하지만 이를 유일한 기준으로 수치화하여 살생부와 다름없는 선고를 내리는 것은 사회적 자산인 대학을 파괴하는 반교육적 행위로 보인다. 지난 13년 동안 등록금을 동결시켜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사립대학에 정부지원 사업비와 연동된 대학평가는 진퇴양난의 올무이다. 그리고 미선정 대학은 온 나라에 부실대학으로 낙인찍히는 참담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 점 몹시 안타깝다.
한 가지 더해 올해 이루어진 ‘대학 기본역량 진단’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진행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래서 평가단이 직접 대학을 방문하거나 대학 구성원들과의 인격적인 만남도 갖지 못했다. 그 대신 교육부에서 제시한 기준에 따라 대학에서 자체 보고서를 제출했고, 진단 당일에도 대형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평가단과 대학의 준비 인력들이 불과 1시간30분 동안 질문과 대답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대학의 교육능력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었는지 아주 궁금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학의 생명은 자율성에 있으며 다양한 대학 생태계야말로 기후변화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국가경쟁력이다. 오늘날 세계를 휩쓰는 한류의 성공에는 빈약했던 우리나라 문화의 경쟁력을 위해 개방과 규제 완화, 지원하되 불간섭을 고수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원칙이 한몫 기여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등록금 대비 160%의 재원을 교육비로 투입하기 위해 대학은 불철주야로 사회적 기여도를 높이며 동문과 후원자들에게 캠페인을 통해 기부금을 모으고 있는데, 교육부의 발표로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말았다.
독일 철학이 세계 정신사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하이데거나 헤겔이 독일 교육부가 제시한 역량 중심으로 교육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만일 우리나라 교육계에 화두처럼 떠오르는 온갖 계량적 평가와 환류 만능주의 사고방식을 들으면 두 철학자는 몹시 의아해할 것이다. 아쉬운 점은 그들을 무덤에서 소환해낼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교육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지적, 영적, 인격적 변화의 총합이다.
이 글에 긍정적인 반응도, 부정적인 반응도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정작 경계할 점은 정부의 재정지원에 발목이 잡혀 대학이 침묵하는 사태다. 그렇게 조금씩 길들여지다 보면 교육부 기준에 맞추려 안간힘을 쓰는 처참한 신세의 대학만 남고 하이데거나 헤겔 같은 철학자의 등장은 기대하기 힘든 날이 올 것이다. 공포와 무관심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까닭이다. 어떤 후속 글도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