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이병초ㅣ시인·전북작가회의 회원
신석정(1907~1974) 시인을 기억한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눈에 띄게 항일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어로 작품을 써서 보내라는 협박에 가까운 원고 청탁을 거절한, 친일 행위에 일절 가담하지 않은 채 식민지 시대를 견뎠다.
초기 시에서 말기 시에 이르기까지 신석정의 시는 새벽과 봄날을 치열하게 기다렸고, 그의 이런 시관(詩觀)은 죽는 날까지 일관되었다. 삶의 처지에 따라서 표변해버린 시인을 만날 때마다 당혹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신석정의 시를 만날 때면 역사의 정신을 만난 듯 반가운 것도 사실이다. 김억과 김기림 등에 의해 목가 시인의 마스크를 쓰고 살았고, 아직도 그의 시를 목가시 틀에 가둬놓고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1939년 10월 ‘방’이라는 시 때문에 일제의 하수인들에게 조사를 받았고, 1940년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는 검열, 삭제되었다. 급기야 그는 1941년 절필을 선언했다. 이런 사실을 꿰뚫고 있는 정양 시인은 “현실도피적 목가시로 폄하되는 시들이 사실은 시대적 절망과 생활고 속에서 식민지 시대를 올곧게 살았던 떳떳한 삶의 기록”(<세월이 보이는 길>, 142쪽)이라고 평가했다.
광복 후의 혼란은 신석정 시인을 더 곤혹스럽게 했다. 조국 분단이라는 역사를 객관화하기도 전에 한국전쟁을 맞았고, 휴전이 되었어도 삶은 이렇다 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9·28 수복 후에도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수시로 경찰국에 소환당했던 신석정.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단식의 노래’와 ‘춘궁은 다가오는데’를 발표하자 쿠데타 일당은 그를 구금했다. 박정희 패거리는 1969년 현직 국회의원과 대학교수 등 60여명을 구금하고 고문과 협박을 자행했는데, 이때 시인도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다. 그의 ‘서울, 1969년 5월 어느 날’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취조당한 일을 쓴 시였다.
신석정 시인이 항일 시인이든 목가 시인이든 그것은 그의 시에 중요하지 않을 성싶다. 하지만 그의 시편들 이면에 생략된 역사적 사실만큼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시 역사의 당위성일 것이다. 또한 신석정 시인은 역사 현장의 입회인이 되고 싶었던 올곧은 지식인이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터이다. 시관이 평생 일관된 분으로, 큰 시인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신석정 시인의 고택이 철거될 위기에 놓였다. 전북 전주시 남노송동에 자리 잡은 ‘비사벌초사’는 시인이 1961년부터 여생을 보낸 자택이다. 이 고택에는 이병기, 박목월, 김남조, 박두진 시인 등이 자주 들렀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시집 다섯 권을 냈는데 <촛불>과 <슬픈 목가>는 고향인 전북 부안군 청구원에서 펴냈고,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 세권은 비사벌초사에서 펴냈다.
전주 병무청구역 재개발추진위원회는 “기상청 이전 문제로 10여년을 끌다 어렵게 결실을 맺고 있는 재개발 계획이 차질을 빚을 정도로 시인이 머물렀던 고택의 문화재 가치가 높다고 볼 수는 없다”라고 밝혔다. 재개발추진위원회의 빈약한 지식이 서글프다.
이에 시민들과 문인들께 호소한다. 부조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신석정 시인, 그의 얼이 깃든 비사벌초사를 지킬 수 있도록 응원해주고 협조해주길 호소한다. 아직 촛불을 켜지 말자고, 이제야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느냐고, 인위적인 촛불을 꺼버리고 캄캄한 어둠을 제대로 견뎌야만 새벽이 온다는 큰 가르침을 더 이상 모욕 주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