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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황혼 육아의 즐거움

등록 2021-09-27 16:59수정 2021-09-28 02:33

[왜냐면] 김성일ㅣ전 강릉원주대 교수

10월2일은 노인의 날이다. 보건복지부의 2018년 보육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가정에서 영유아를 돌보는 사람의 84%가 조부모다. ‘황혼 육아’는 대개 손주의 출생부터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이어진다. 조부모가 건강하면 때로는 중학교 시기까지 연장되기도 된다. 일부 조부모는 딸이나 며느리한테 용돈 겸 육아비용을 받기도 하지만 조금 여유가 있으면 육아에 소요되는 경비를 말없이 자비로 충당하는 경우도 많다.

나도 70대 중반에 외손녀를 돌보는 과정에서 힘들고 피곤할 때가 많지만 순진하고 귀여운 언행에서 즐거움과 기쁨도 누리고 있다. 유아기에는 수시로 안아줘야 하고, 그 과정에서 허리와 손목에 부담을 줘 손목이나 무릎 관절, 척추 손상을 염려하게 될 때가 적지 않았다. 아이가 큰 다음에는 자전거나 킥보드를 태우며 무심코 같이 뛰어다니다가 다리가 아파 며칠 쉬어야 할 때도 있었다.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외손녀와 이전처럼 신체 활동을 함께하는 경우는 크게 줄었으나, 여전히 동네 주변 한적한 곳을 함께 산책하거나 학교·학원 숙제보다 텔레비전 시청이나 컴퓨터 게임을 우선하려는 시도를 억제하는 악역을 수행하기도 한다. 외손녀는 휴대전화가 아직 없는데도 어디서 배웠는지 여러 낯선 기능을 잘도 알려주고 있다.

간혹 손녀가 다치거나 숙제 점검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혹은 간식을 너무 자주 사줘서 딸로부터 질책을 받으면 속상할 때도 많다. 예컨대 더울 때는 아이스크림을 자주 사주게 되는데 엄마에게 비밀이라고 해도 외손녀가 대뜸 자랑하는 바람에 들통이 난다. 딸은 거짓말까지 한다고 나무란다. 외손녀에게 간식 사주고 욕을 듣는 것이다. 자녀를 맡긴 부모는 조부모가 손주들을 잘 돌보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이따금 손주들이 어떤 식으로 반항하며 제멋대로 구는지, 동작이 느리거나 잘 알아듣지 못하면 어떻게 무시당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나중에 설명을 들어도 충분히 실감하지 못한다. 때로는 그런 하소연을 가벼이 여기거나 듣기 싫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계유지에 힘겨워하거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가지려는 경우가 아니라면, 손주를 돌보며 가족 간 유대를 도모하는 것은 매우 보람 있는 활동이다. 아무 할 일 없이 공원이나 동네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노인과 비교할 때 손주와 함께 건강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으로 여길 수 있다. 예쁜 손주를 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부모의 은공을 되새겨보는 것은 부수적인 소득이다. 내가 자녀를 키울 때는 직장 일이 바빠서 자녀와 충분한 시간을 함께하며 부모·자녀 관계를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고, 은퇴한 뒤 정작 시간이 있을 때도 맞벌이에 분주한 자녀와 대화를 나누며 상호이해를 돈독히 하는 기회는 많지 않다. 오히려 손주를 키우며 자신과 자녀의 성장 과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 같다.

2017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70대 이상 노인 수백명을 대상으로 20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를 보니, 손주나 이웃 등을 돌보며 사는 노인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오래 살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는 살아갈 이유가 되어 건강하고 더 오래 이 땅에 발붙이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나이가 한참 어린 상대라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관심과 온정을 주고받으며 얻는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은 스트레스 감소와 질병에 대한 면역력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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