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왜냐면

‘비천한 출신’ 논란이 놓친 것

등록 2021-12-27 18:05수정 2021-12-28 02:01

개천용 서사보다 열악한 노동에 주목해야
한 대학의 청소노동자가 이른 아침 출근해 화장실 세면대를 닦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 대학의 청소노동자가 이른 아침 출근해 화장실 세면대를 닦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왜냐면] 김동수 | 기록노동자·<유령들: 어느 대학 청소노동자 이야기> 저자

‘청소하는 엄마들’이 쉬는 시간에 모이면 자주 이야기하는 주제가 있었다. 바로 자식들의 직업이다. 사실 거기서 그들의 등급이 결정된다. 선망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자식을 길러낸 엄마일수록 발언을 주도한다. 반면에 자신과 같이 3D 업종의 일을 대물림한 자식의 부모는 대개 침묵을 지키는 편이다. 그곳에서 엄마들은 자식의 직업을 통해 자기 인생의 성공 여부를 증명받는다. 청소 일을 한다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닌 셈이다. 그런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이렇게 정의한다. 천하다. 밑바닥이다. 하찮다. 열악하다.

좌판 장사를 하며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어머니 밑에서 검사가 된 아들의 스토리는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의 전형이다. 개천의 용이 된 자식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부모와 대비되기 마련이다. 그때 부모의 직업은 가난을 상징하고, 자식의 직업은 출세를 은유한다. 그 대비 효과가 클수록 감동은 배가된다.

분명한 건 그 성공 스토리가 구전될수록 부모의 헌신적인 이미지만 남을 뿐, 그들이 해야 했던 일의 열악함은 은폐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부모의 직업이 서사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용이 된 자식은 무수한 역경을 이겨내야만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그 역경의 근원은 무엇인가? 가난이다. 결국 ‘개천용’ 서사의 힘은 가난에서 시작된다. 가난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난에 발목 잡힌 사람들의 일터는 대개 열악하다. 그 직업들이 가난과 동일시되는 부분 때문에 개인의 열악한 일터는 자연스레 가난이란 범주에 포괄되어 지워진다. 또 한편으로는 누구나 용이 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그 희소성 덕에 개천용 서사의 환상은 더 거품화된다. 가난해도 노력만 하면 용이 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직업의 귀천을 고착화한다. 굳이 열악한 일터를 개선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열악한 일터에 불만을 토로하는 당사자들도 물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식에게만 헌신하는 ‘부모’가 아니다. 모두가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바꾸려는 ‘노동자’다. 그들은 자식을 개천의 용으로 키우지 못했다고 침묵해야 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싸운다. 대학 청소·경비노동자들의 투쟁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럼에도 ‘싸우는 부모들’의 투쟁 스토리는 잘 소비되지 않는다. 개천을 정비한다는 뻔한 흐름보다야 그곳에서 용이 태어난다는 에스에프(SF)적 결말이 훨씬 더 극적인 반전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 4일 한날에 말과 글로 개인사와 현시대상을 이야기했다. 첫번째는 자신을 ‘비천한 출신’이라고 표현한 발언이다. 이는 불우했던 가정환경과 시장 화장실 청소부인 부모의 직업에서 비롯됐을 터다. 이런 와중에 그는 무일푼의 소년 노동자에서 거대 여당의 대선 후보로 ‘출세’한 개천의 용이 됐다. 다른 대선 후보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이력이므로 현재 자신의 높은 비호감도를 줄일 무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려면 그동안의 역경을 더 부각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 방법으로 보이지 않는 신분제가 세상에 존재함을 ‘비천한 출신’이란 단어의 조합으로 드러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밑바닥에서 최정상으로 올라서는 드라마틱한 삶을 조명하기 위해.

두번째는 청소·경비노동자들의 쉴 권리를 보장해주자는 에스엔에스(SNS) 글이다. 두 이야기는 사실 연결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청소노동자들은 쉴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할 만큼 ‘비천하게’ 일한다. 그런데 대중은 쉴 ‘권리’보다 비천한 ‘출신’에 더 관심을 보였다. 개천용 서사의 근원적 요소에 역시나 발 빠르게 반응한 셈이다.

생애 주기상 고연령층 여성 대부분은 집안일에서 파생된 청소, 돌봄 등의 바깥일에 복무한다. 개천용 서사의 배경이 되는 핵심 요소들이 요즘도 그 일터들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뻔한 클리셰의 창작물이라도 대중에게 사랑받듯, 사람들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쓴 개천의 용들에게 언제나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때마다 엄마의 일터는 더 힘들고, 더 더럽고, 더 위험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회는 여전히 밖에서 ‘집안일’을 맡은 엄마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원한다. 그 이유는 과연 뭘까?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는 모성애 때문일까? 일터의 비용 절감을 위한 고전적 노무관리시스템 때문일까? 더 감동적인 개천용 서사를 바라기 때문일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