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류웅재 |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최근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 구조조정의 문맥에서 인문학 위기 담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것이 그동안 끊임없이 등장한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현실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한 말의 영역이 아니라 대학의 학과 편제나 제도 개편에 실제로 반영되고 있기도 하다. 가령 많은 대학에선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란 용어에 비유되던 문사철 관련 학과를 폐지하거나 학생을 모집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학과로 개명하고 기존 학과들을 통폐합하는 정책도 가속화하고 있다.
이제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는다는 농담이 그저 농담이 아님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지난 20여년간, 고등교육 정책 및 사회 변화에 조응해 대학 내부적으로도 체질 개선을 위한 노력들을 경주했다. 또한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등 부처는 인문학 관련 정책을 위한 각종 심의·자문기구를 활용해 인문학 진흥을 위한 정책적 지원을 시도했다. 인문학의 학제 개편을 비롯해 인문학의 실용적 쓰임새에 관한 논의는 그 중심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다. 일례로 거리의 인문학, 시이오(CEO)를 위한 인문학, 인문학적 경영, 디지털 인문학, 뉴노멀 인문학 등 현실의 필요와 사회적 상상에 의해 인문학의 역할과 관련 담론이 바뀌어온 것을 들 수 있다.
학문은 그 개입 방식의 기술적 문제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예외 없이 현실과의 유기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과거의 철학이 현실의 문제에 밀접하게 연결되고 상호 개입해왔듯, 오늘날 인문학은 인공지능(AI), 플랫폼노동 등의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인문학이 타 학문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과거 예술가들이 후견인의 취향을 맞추던 방식으로, 도구적 성격을 강하게 노정한다. 이는 <해리 포터>나 <오징어 게임> 등 이른바 킬러콘텐츠의 스토리텔링을 구축하는 질료로 순화되고 선별된 이야기, 혹은 문화산업을 위한 상품 개발이나 연구조사 기능으로 인문학을 바라보는 자본과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는 일부 인문학 연구자들과 이것을 독려하는 정부와 대학의 정책적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의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 진흥 기본계획’은 인문학 진흥 정책과 관련한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방식이나 효과에 의문을 남긴다. 이는 마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처럼 토건적 방식이거나 인문 정신과 배치되는 하향식 방식에 대한 우려에 맞닿아 있다. 여기에 디지털인문학2.0, 에이아이 인문학 등 그럴듯한 이름을 갖다 붙여도 그 실체가 ‘인문학적’인지, 아니면 인문학은 경제나 통치 등 그 무엇을 위한 연장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국가 차원에서 발화되는 인문학 중흥론이 겨냥하는 지점이 창조경제나 한국판 뉴딜이라면, 여기에서 활용되는 인문정신문화나 진흥 개념들은 과거의 계몽주의적 유산이며, 이 계몽의 목적과 완성은 국가와 국민의 일체화에 다름 아니다.
대학의 융복합 교육 강화나 학과 간 연계전공, 커리큘럼 개편, 연구소 운용 등에서도 인문학을 어느 때보다 중시하는 듯하지만 정부 지원이나 특허를 위해 ‘분칠하듯’ 인문학을 형해화해 활용하는 태도는 인문학 진흥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런 태도는 기술 진보가 간과하는 인간의 영역, 소수자와 공정의 문제들을 ‘인문적으로’ 해결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인문학은 인문학의 전통 내에서 비판정신과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 교양교육 확산, 인문사회 분야 학문 후속세대 육성, 무엇보다 자본에 동조하는 공학적인 세계관에 끊임없이 괄호치기 하고 죽비처럼 내려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가나 과학기술의 힘을 맹신하는 관료들, 그에 동조하는 학자들에게 관련 정책 결정을 위임해선 인문학의 미래는 암울하다. 하나의 대안으로 모든 것을 제도화하긴 어려울지라도 최소한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영국식 창의산업의 팔길이(Arm’s length)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것, 케이(K)-컬처로 상징되는 한국 대중문화의 약진과 그 이면의 자본과 국가주의가 공모하는 구도에 비판적인 연구들, 사회적 소수자와 젠더, 지역과 청년 문제 등에 대한 창의적이고 재기발랄한 연구들을 더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적인 고려와 사회적 공감대의 확산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