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등 시민사회단체가 24일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앞에서 HDC현대산업개발, 카카오, 이마트 등의 이사회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주주가치가 훼손됐다며 국민연금공단이 대주주로서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왜냐면] 노종화 | 변호사·경제개혁연대 정책위원
국민연금은 주지하다시피 국내 주식시장의 큰손 중의 큰손이다. 작년 3분기 말 기준 약 164조원을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고, 이는 전체 기금의 18%에 달한다. 따라서 국민연금이 안정적인 자산운용을 통해 국민 노후자금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내 주식에서 준수한 성과를 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주주권 행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경영진이 기업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한 경우, 적극적인 관여 활동으로 주주가치 훼손을 막아야 한다.
다만 국민연금이 주식시장의 최대 투자자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특정 기업의 지배주주는 아니다. 소유 구조가 분산된 일부 기업에서는 매우 드물게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인 경우도 있지만, 경영권을 확보할 만큼 독보적 지분을 가지고 있진 않다. 지배주주를 제외한 일반 주주 중에서 상당한 지분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민연금이 2020년 말 기준 5% 이상 지분을 가진 종목은 270여개이고, 10% 이상은 90여개이다. 반면, 15% 이상 보유한 종목은 단 하나도 없다. 현실적으로 지분율을 고려할 때, 국민연금과 같은 지위를 가진 주주는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더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기가 쉽지 않다.
국민연금과 같은 지위에 있는 주주가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주주권 행사 수단이 주주대표소송(이하 대표소송)이다. 이는 최소한의 지분 요건 등을 갖춘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불법행위나 임무해태로 손해를 끼친 임원(이사 및 상법상 업무집행지시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다. 주주가 원고이고 불법 등을 저지른 임원이 피고이지만, 주주가 승소할 경우 회사가 손해를 배상받는다.
예를 들어, 지배주주인 이사가 개인 이익을 위해 계열사를 동원하는 등 불공정한 내부거래로 회사에 손해를 입힌 경우나, 과점 시장에 속한 회사가 이사의 지시 및 묵인하에 담합을 저질러 대규모 과징금을 부담한 경우, 대표소송으로 회사 손해를 보전할 수 있다. 지배주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회사 손해를 감수할 유인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또한, 경영진은 회사가 대규모 과징금을 부과받게 되더라도 눈앞의 실적을 위해 담합을 저지를 수 있다. 대표소송은 지배주주나 경영진이 이런 경제적 유인을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불법행위와 회사의 손해를 방지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얼마 전 대법원은 담합을 직접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감독 의무를 의도적으로 외면해 사실상 담합을 묵인한 이사에 대해서도 배상책임을 인정한 전향적인 판결을 했다.(동국제강 사건) 이 판결 전까지 이사회 구성원의 책임 회피를 위한 최선은 회사에서 벌어지는 불법행위를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법원이 감독 의무를 전향적으로 인정한 만큼, 대표소송이 활성화된다면 감독 의무를 적극적으로 이행하는 것이 최선이 될 수 있다.
최근 재계는 대표소송 결정 주체와 절차, 대상, 남소 가능성 등을 지적하며, 국민연금의 대표소송 추진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국민연금의 대표소송 개편을 대선 전까지 보류해야 한다고 밝혀 사실상 재계 편에 섰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정권의 정치적 지형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오로지 기업가치 증대, 기금수익률 제고만을 고려해야 한다. 재계는 대표소송이 ‘기업 벌주기’라며, 이제는 꽤 익숙한 여론전도 펼치고 있다. 그러나 회사는 대표소송으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손해보전과 불법행위 억제라는 상을 받는다. 소송 당사자도 원칙적으로 회사가 아니라 임원인 만큼, 소송 진행을 위한 비용도 들지 않는다. 국민연금의 공식적 입장이나 계획이 전해지고 있지는 않으나, 독립적인 지위에서 적극적으로 대표소송을 추진하기 위한 노력은 재계의 잘못된 우려나 선거와 상관없이 계속돼야 한다. 국민연금은 2018년 12월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을 의결했고, 이듬해 1월 소 제기 절차와 요건에 관한 기본 방침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 후 단 한건의 대표소송도 제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대표소송을 전면 재검토하거나, 선거를 고려해 보류할 때가 아니다. 국민연금의 미온적 태도를 비판하고,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요청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