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선학태 | 전남대 명예교수·정치학
정당 간 연합정치는 아직 한국 민주주의엔 낯설다. 대통령제-연합정치 조합은 궁합이 맞지 않아 ‘죽음의 키스’로 갈 운명이라는 것. 이런 오해는 정치인, 언론, 심지어 학자들에게도 꽤 널리 퍼져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제와 연합정치는 순기능적으로 조응할 수 없는 걸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디제이피’ 연합정치를 실험했다. 내각연합-정책연합-입법연합은 외환위기 극복과 생산적 복지국가를 견인했고, 나아가 남남연합, 남북 평화공존으로 이어진 대장정의 동력이었다. 특히 남북관계의 근본 기조를 바꾼 햇볕정책은 남남갈등이라는 격렬한 저항 없이 출항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김대중은 이념을 뛰어넘는 정당연합으로 민주주의-경제복지-평화 3축이 맞물려 돌아가게 하는 대통령으로 부상했다. 헌정사에 연정 대통령이라는 가히 기념비적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소년공에서 출발한 남미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 그의 노동자당(PT)은 10여개 좌-우 군소정당과의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의회와의 협치를 통해 한편으론 저소득층 현금복지 정책으로, 다른 한편으론 보수우파 연정 파트너 정당들의 친기업적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사정 대타협을 유도했다. 복지-성장 선순환 정책 패키지로서 극심한 빈부 격차로 쪼개진 국민을 통합시킨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87%라는 미증유 경이로운 지지율로 ‘영광과 기적의 8년 드라마’를 연출했다. 목하 브라질 국민들은 ‘룰라 향수’에 꽂혀, 그를 오는 10월2일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재소환하고 있다.
김대중·룰라 전 대통령은 설령 제왕적 대통령제라 하더라도 행정부-의회 협치를 매개하는 연합정치라는 고리를 통해 내각제처럼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정 대통령은 각료 배분으로 대통령의 헌법상 제왕적 권력을 분산하는 길을 열어준다. 그렇기에 연합정치는 행정부-의회 간 정책·입법 충돌이라는 대통령제의 아킬레스건을 피하는 최고의 협치 기예이다.
개혁보수도 동참했던 ‘촛불항쟁’ 정신을 계승한 문재인 대통령. ‘촛불 연정 대통령’으로 가는 길이 순리였다. 이념연합→입법연합→내각연합→개헌연합으로 ‘87년 헌정체제’를 교체하는 합의제 ‘2017년 헌정체제’를 창출하는 프로젝트야말로 문 대통령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소명이었다. 그러나 승자 권력독점으로 촛불혁명은 분노-열망-실망 사이클을 보이며 미완에 그쳤다. 작금의 한국 민주주의는 정상적 궤도를 이탈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해방공간에서 찬탁과 반탁의 좌우 충돌이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듯, 진보-보수 충돌로 우리 사회엔 ‘남남 분단’ 징후가 어른거린다.
정권을 재창출하려면 더불어민주당은 ‘촛불혁명의 제도화’에 나서야 한다. 민주화 제단에 피와 땀과 눈물을 뿌렸던 인사들이 포진한 민주당이 아닌가. 민주당은 압도적 국회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만큼, 소수정당들에 연정 시그널을 보내면 안 된다. 민주당은 이들 소수정당 없이 이미 압도적 국회 의석을 점유하고 있기에, 공동정부 구성 운운하면 선거공학적으로 ‘잔머리’ 굴린다는 의심만을 줄 수 있다. 대신 브라질 룰라와 인생 스토리가 닮은 이재명 후보가 대한민국 ‘경국대전’을 바꾼다는 스탠스로 연정 대통령의 제도화를 유인하는 국회의원 순수 연동형 비례제 및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통 크게 공약하면 어떨까. 이는 깊어진 정치양극화의 골을 개탄하는 중도층의 집단지성과 표심을 뒤흔들 ‘신의 한수’가 되리라.
반면 야권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여소야대 대통령이 출현한다. 소수파 대통령은 거대 야당과의 충돌로 국정마비 사태에 봉착할 수 있다. 이런 ‘외통수 정국’을 돌파하는 전략적 옵션은 연정 대통령의 포용적 국정 거버넌스다. 그 필수 전제조건은 파트너 정당(들)과 각료 배분, 정책 교환·조율 등을 포괄하는 연정협약 체결이다. 이 밑그림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 그래야 소수파 대통령 등장에 따른 국정 불안을 우려하는 중도층의 불안을 잠재우며 표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진통제로 다스릴 수는 없다. 한국 민주주의의 ‘정치적 오지’로 남아 있는 연정 대통령의 제도화가 개척자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곧 한국 민주주의의 민주화 프로젝트 1호다. 유력 대선 주자들의 원모심려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