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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원자력계의 아전인수식 ‘탈원전 탓’

등록 2022-02-09 18:38수정 2022-02-10 02:32

지난 1월 프랑스 전기위원회(CRE)는 주택용 전기요금 44.5% 인상을 권고했지만, 대선을 앞둔 마크롱 정부는 인상폭을 4%로 제한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가동이 정지된 프랑스 아르덴 지역의 슈즈 원전.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난 1월 프랑스 전기위원회(CRE)는 주택용 전기요금 44.5% 인상을 권고했지만, 대선을 앞둔 마크롱 정부는 인상폭을 4%로 제한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가동이 정지된 프랑스 아르덴 지역의 슈즈 원전. 위키미디어 코먼스

[왜냐면] 석광훈 |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

지난 8일 “탈원전 정책 때문에 2030년까지 전기요금이 44% 인상된다”는 원자력계의 주장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계산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는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 각국의 경기부양책으로 전선용 구리 가격마저 천정부지로 오른 원자재 대란 시대와 동떨어진 ‘우물 안 개구리’식 숫자놀이에 불과하다. 심지어 ‘탈원전 때문’이라는 향후 9년간의 요금인상률 전망치조차 원자력계가 그토록 칭송해온 ‘원전 대국’ 프랑스의 지난 한 해 전기요금 원가 상승분만도 못하다.

실제로 지난 1월 프랑스 전기위원회(CRE)는 주택용 전기요금에 대한 검토 결과 지난해 원가 상승분을 고려해 올해 2월부터 요금을 44.5% 인상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4월 대선을 앞두고 여론을 의식한 마크롱 정부는 권고를 무시하고 인상폭을 4%로 제한했다. 또한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해 전기요금의 20%를 차지하는 전기소비세를 면제하고, 나머지는 프랑스전력공사의 손실로 떠안게 했다.

그러나 프랑스전력공사의 적자분도 결국 나중에 국가가 세금으로 보전하게 될 공산이 커 전기요금 인상분을 모두 세금으로 메운 셈이다. 탄소중립이나 에너지 절약 문제를 떠나, 과연 이런 ‘조삼모사’식 전기요금 통제가 복지에 도움이 되기는 할까? 사실 복지정책이나 소득재분배 정책과 달리 전기요금 할인은 대부분 구매력이 높은 소비자에게 집중되기에 소득 역진성이 크다.

국내 요금 보조의 대표 사례인 농사용 전기요금은 영세농 지원 차원에서 원가의 절반 이상을 할인해준다. 하지만 한국전력공사 자료를 보면 2020년 농사용 전기 할인 총액 1조942억원 중 4480억원이 불과 7800호의 대형 농가(호당 5744만원)에 돌아갔고, 189만호의 일반 농가에는 호당 34만원의 푼돈이 돌아갔다. 결국 농사용 전기요금제는 할인액의 40%를 0.4%의 기업농에게 몰아준 셈이다. 심지어 수입업체들도 중국산 냉동식품을 들여와 싼 농사용 전기로 대량 건조해 국내에 유통시키는 등 왜곡된 전력수요 증가 문제는 덤이다.

이런 소득 역진성과 에너지 시장 왜곡 때문에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국가들은 일찌감치 전기요금 할인을 대부분 철폐하고 필요시 직접보조 원칙을 고수해왔다. 프랑스와 이웃한 벨기에도 지난 2일 지난해 원가 상승분을 반영해 주택용 전기요금의 42% 인상을 허용하되, 소비자들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100유로(약 14만원)의 직접보조금을 지급하고 취약계층 요금제만 동결시켰다. 어차피 요금인상분과 지원금이 상쇄되어 프랑스 사례와 유사하게 들리지만, 이는 시장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적으로 민생을 챙긴 정책이다.

반면 ‘원전 덕분에 전기요금이 저렴하다’고 홍보해온 프랑스는 요금 할인 남발로 전기요금이 가격신호를 상실한 지 오래다. 덕분에 프랑스는 매년 겨울철 비효율적인 전열난방기기에 대한 높은 의존도로 고질적인 전력난을 겪으며 독일로부터 막대한 전력을 수입해야 한다. 제 기능을 상실한 전력시장에 원전이 아무리 많아 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던 것이다.

빠르고 과감한 혁신이 필요한 탄소중립 시대에 매일같이 쏟아지는 원자력계의 아전인수식 ‘탈원전 탓’ 보도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시계를 30년 뒤로 돌리게 만든다. 정부 역시 실질적 복지 개선에는 ‘자린고비’ 행세를 하며 전기요금 할인으로 생색내는 관행을 거듭해왔지만, 이는 고도로 성장한 국내 시장경제와 더는 부합하지도 않고 전기요금의 수요관리 기능만 무력화시킨다. 이제는 정부가 국민의 기본소득을 일부라도 보장해 복지를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희소한 전기는 제값을 주고 쓰도록 시장을 정상화하는 게 우리 경제와 사회 수준에 필요한 개선이다. 이러한 개선이 있어야 구호에 비해 내실이 부족한 탄소중립 정책을 실현할 시장 토대가 마련되고 고효율 에너지 기술들이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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