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김승근 | 전 혈우병환우회 한국코헴회 사무국장
지난해 8월 정부는 ‘문재인 케어’ 4주년 성과 보고에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 2018년부터 2020년까지 국민 3700만명이 약 9조2천억원의 의료비 경감 혜택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는 것은 국민보건을 향상시키고 사회보장을 증진한다는 건강보험의 목적에 마땅히 부합한다.
다만 이런 건강보험 정책에서 정작 가장 혜택을 필요로 하는 혈우병 등 희귀난치성질환 환자들은 소외되고 있다. 국내 희귀난치성질환 환자는 약 8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환자 수가 적다 보니 희귀난치성질환 의약품은 개발이 더딜 수밖에 없다. 희귀난치성질환 중 치료제가 개발된 질환이 약 6%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한 희귀난치성질환은 일반 질환과 달리 임상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희귀난치성질환의 비용효과성을 입증하기 위한 통계적 자료를 확보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어렵게 개발된 신약이 사용 허가를 받는다 해도 경제성 평가를 이유로 건강보험 등재 관문을 넘기지 못해 환자들한테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한정된 재원을 고려해야 하는 현실도 있지만 당장에 치료제가 있음에도 비용으로 인해 기약 없이 급여를 기다리며 남은 수명을 이어가야 하는 것은 희귀난치성질환 환자와 그 가족에게 너무 가혹하다. 국내 희귀난치성질환 환자의 치료제에 대한 접근성은 크게 개선되어야 한다.
지난 국정감사에서도 척수성 근위축증을 앓고 있는 13개월 아동의 어머니가 참고인으로 출석해 “약효가 확실한 대체 불가 치료제가 나왔지만, 고가의 치료제를 구매할 돈이 없어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한다”고 호소한 덕분에 희귀난치성질환 환자들의 상황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물론 여야 의원들의 정책 개선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급여가 지연되는 것은 결국 경제성 평가 등을 통한 신약의 비용효과성이 입증돼야 급여가 결정되는 까다로운 등재 절차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2일 열린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는 급성림프구성백혈병·림프종 치료제와 비소세포폐암 면역항암제 급여가 경제성 평가 검토 미흡을 이유로 안건으로 상정조차 되지 않아 많은 환자들이 절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정부가 환자들의 생명보다 건강보험 재정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건강보험의 목적을 되짚어본다. 환자의 생명보다 중한 것은 무엇인지 곱씹어본다. 환자들이 유일한 치료제를 기다리다 행정 절차나 미흡한 정책 때문에 이를 써보지도 못하고 생명을 잃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우선 건강보험 급여를 적용해 위급한 환자의 생명부터 살리고, 비용효과성 평가를 통한 최종 약가 결정 및 정산은 사후(死後)가 아닌 사후(事後)에 진행하면 될 일이다.
올해는 때마침 정부가 2차 희귀질환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하는 해이며 매년 2월 마지막 날은 세계 희귀질환의 날이기도 하다. 희귀질환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개선되고 있는 지금, 생명과 직결된 치료제에 대한 급여는 비용이 아닌 국민건강에 대한 ‘투자’로 보아달라는 주장에도 귀 기울여주길 바란다. 여전히 비용 측면에서 일부 우려 섞인 시선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환자들이 건강을 되찾아 건강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면 건보 재정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목숨을 건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