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호원경 | 서울대 의대 교수
우리나라에서는 과학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일이 드물다 보니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2022년은 유엔이 선포한 세계 기초과학의 해이다. 기초과학 하면 물리, 화학, 수학 등 어렵기만 한 시험 교과목을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이 시점에서 유엔이 왜 기초과학의 해를 선포했는지 의아할 것이다. 누군가는 대학에서의 기초과학 위기를 떠올리며 위기에 빠진 기초과학을 구하자는 운동인가 보다 짐작할 수도 있겠다. 필자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인터넷을 찾아보았고, 우리 사회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쓴다.
2015년 유엔은 ‘어젠다 2030’, 즉 2030년까지 달성할 의제를 결의하며 인류와 지구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행동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 SDG)를 선포했는데, 올해는 에스디지를 위한 필수적인 선행조건(sine qua non)이 기초과학임을 강조하며 ‘세계 기초과학의 해 2022’를 선포했다. 주목할 점은 여기서 얘기하는 기초과학은 물리, 화학, 수학 등의 분야를 규정하는 의미가 아니라 ‘호기심에 기반한 과학연구’(curiosity-driven scientific research)를 뜻한다는 점이다. 즉,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행동목표를 달성하려면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바탕이 돼야 하며, 이는 호기심에 기반한 연구를 통해 이루어짐을 명시하는 선언이다.
이 시점에서 이런 선언이 나온 것은 지난 2년여의 코로나 팬데믹에 이 정도로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수십년 이상 축적되어온 호기심에 기반한 과학연구의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그러할 것이라는 깨달음에 기인한다. 또한 정책결정자를 포함한 국민들의 과학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이 팬데믹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 것도 유엔이 중심이 되어 세계적인 캠페인을 벌이는 이유다.
유엔이 하는 일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던 필자는 유엔이 기초과학의 중요성과 역할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해 전세계에 선포한 것이 놀랍고도 기뻤다. 40년 전, 필자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기초의학 연구를 하겠다고 생리학 실험실에 첫발을 들여놓으며 호기심에 가슴이 뛰던 때가 고스란히 되살아나며, 나를 연구로 이끈 것이 바로 자연과 우리 몸의 이치에 대한 호기심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 것은 언제부터인지 자신의 연구를 설명하는 데 무엇이 궁금해서 이 연구를 하는지보다 연구 결과가 어디에 쓰일 수 있는지를 앞세워야 하는 상황에 익숙해져버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된 데는 정부 과학기술정책이 경제발전이라는 목적을 위한 기술개발에 치우쳤을 뿐만 아니라, 기초연구 지원조차도 호기심에 기반한 연구를 인정하지 않고 목적기초, 전략기초, 기초원천 등 각종 신조어로 목적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런 신조어를 앞세운 연구사업에서 연구자의 호기심 따위는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세계 기초과학의 해 선포가 목적성 연구 일변도의 과학정책을 되돌아보게 하고, 호기심에 기반한 연구야말로 과학의 본질이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기술 개발에 필수적인 선행조건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킴으로써 창의적 기초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올해는 기초과학의 중요성과 역할을 조명하기 위한 행사와 캠페인이 전세계에서 열린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주 세계 기초과학의 해 한국 선포식이 열렸다. 앞으로 이어질 행사에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여 기초연구의 즐거움과 가치를 학문 후속 세대에게 알리고, 정부에는 기초연구 지원의 기본 원칙을 확립할 것을 촉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과학이 한 단계 도약하는 중흥기를 만들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