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30일 동국제강 포항1공장 앞에서 포항시민단체연대회의 관계자가 산재사망사고 재발방지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권영국 | 중대재해전문가넷 공동대표·유족대리인
지난 18일 아침 7시 경북 포항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의 통곡 속에서 동국제강 포항공장 하청노동자 이동우님 장례식이 거행됐다. 고인은 지난 3월21일 동국제강 포항공장에서 천정크레인 보수작업을 하러 크레인에 올라갔다가 갑작스러운 크레인 작동으로 안전벨트에 몸이 졸려 흉부 압박으로 질식사했다. 그로부터 90일 만에 치러진 장례였다.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님 장례가 62일 만에, 평택항 이선호님 장례가 59일 만에 치러졌다. 이동우님 장례는 왜 이렇게 늦어진 것일까? 여기엔 중대산업재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원청 동국제강과 경영책임자의 태도가 결정적인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동국제강은 포항공장만 상시근로자 수가 460여명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기업(도급인)이다.
고인이 사고를 당한 지 3일째인 3월23일 강은미 정의당 국회의원과 함께 현장을 찾았을 때, 동국제강은 “그곳은 안전대 고리를 거는 곳이 아닌데”라는 말로 사고 원인을 ‘안전대 고리를 불안전한 장소에 체결’한 개인의 부주의로 돌렸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님 사망 사고 당시 “그곳은 작업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닌데”라는 말을 다시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사 결과, 동국제강은 사고 당시 안전담당자를 작업 현장에 배치하지 않았고, 천정크레인 작동 위험이 있을 때는 작업자가 크레인에 올라가기 전 전원을 차단해야 하는 수칙에도 불구하고 전원차단 상태를 관리하지 않는 등 안전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도 동국제강은 사고 발생 직후 이 사고가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대응했다. 사고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 남긴 채 20여일이 지나도록 유족에게 이렇다 할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유족은 동국제강의 무책임한 태도에 항의해 4월13일 동국제강 서울 본사를 찾아 입장문을 전달했다.
유족은 입장문에서 동국제강의 최고경영자인 장세욱 대표이사에게 고인의 죽음과 관련해 공개사과하고, 재발방지대책을 세우고, 중대재해처벌법 취지에 따라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4월18일 1차 협상 자리를 가졌으나 회사 협상대표들은 유족 요구사항에 “입장이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을 뿐이었다. 분노한 유족들은 4월19일 노동시민사회로 구성된 지원모임과 함께 동국제강 본사 앞에 천막분향소를 설치하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고인의 배우자는 임신 3개월째였고 고인의 장모는 암 4기라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협상은 지난 6월14일까지 여덟차례 진행됐다. 14일 8차 협상에서 협상대표들이 9시간 마라톤협상 끝에 합의안을 도출했고, 마침내 지난 16일 오후 1시 합의서 조인식을 했다. 합의서의 주요 내용은 △동국제강 장세욱과 김연극 대표이사 공동명의로 홈페이지 첫 화면에 1주일 동안 사과문 게시 △재발방지를 위해 사고의 핵심적인 원인인 전원차단시스템(ILS)을 모든 설비에 설치 운영 △민사 배상금과 위로금을 우선 지급하되, 중대재해처벌법으로 형사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은 별도 협의 등이었다.
고 이동우님 유족의 대응은 몇가지 성과를 남겼다.
첫째,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원청기업을 상대로 중대산업재해에 따른 법적 책임을 요구하며 대응한 유족의 첫 싸움이라는 점이다. 둘째, 고인이 속한 하청업체에는 노조가 없었지만 유족과 노동시민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한 대기업에 맞서 노조 없는 사업장에서 승리하는 선례를 만들어냈다. 셋째, 원청의 실질적 경영책임자로부터 ‘사고예방조치를 다하지 못해 발생한 사고’임을 ‘인정’한다는 사과문을 받아내고 동일한 죽음이 재발하지 않도록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도록 했다. 넷째, 통상 합의서에 등장하는 ‘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배제해 사업주 형사 처벌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했다.
이런 성과들은 안전조치에 대해 실질적 권한을 가진 원청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게 중대재해 발생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고인과 같은 불행한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업과 경영책임자에게 엄정한 형사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법적 근거인 중대재해처벌법과 시행령을 무력화하려는 윤석열 정권과 자본의 개악 추진을 저지하는 것이다. 고인의 배우자는 제2의 싸움을 다짐하고 있다. 유가족과 동료들이 나서면 노동시민사회는 최선을 다해 연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