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
‘카드빚 탕감’ 을 양극화 개선 계기로 |
최빈자들의 카드 빚을 탕감해주려는 움직임이 있다. 최빈자들의 빚은 모순된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낸 불가피한 결과다. 빚 탕감이 신호탄이 되어 기형적 사회구조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최근 서방 주요 7개국이 최빈국의 빚을 100% 탕감해 주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입각한 시민단체의 요구로 이에 합의했다고 한다. 즉,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기아현상의 책임이 부유국들에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 최빈자들의 카드빚을 탕감해 주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에 반기라도 들듯이 정부가 나선 것이다.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급증하는 현재, 적절한 대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빚을 탕감해 준들 가난이 극복이 되냐’고 되물어 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최빈자들의 빚은 모순된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불가피한 결과다. 그러므로 정부는 본의 아니게 빚지게 되는 현실을 구조조정할 의무가 있다.
첫째, 최빈자의 카드빚 탕감 정책은 적절하지만 무조건적이어서는 안 된다. ‘생계유지를 위한 빚일 때’만이라는 등 조건적 사항을 명백하게 명시해야 한다. 최저생계비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과소비가 있겠냐마는 일부 소수가 편법과 불법을 이용해 이번 정책의 수혜자가 되고자 하는 가능성을 배제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인 데이터로 날카롭게 골라야 한다.
둘째, 홍수가 매번 일어난다면 분명 영구적인 대책이 필요함이 당연하다. 이처럼 가난이 계속 심화된다면 일시적인 빚 탕감 정책보다는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드러나는 결과물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결과의 원인이 무엇인지부터 헤아리고 발본색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부가 진정 경제 양극화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최빈자들이 갚지도 못하는 카드빚을 왜 지는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셋째, 최빈자 정책을 보자. 최저생계비가 지난해에 비해 8.9% 인상되어 4인 가족 기준으로 108만원에서 113만원으로 올랐다. 그러나 오른 물가를 고려하지 않아 현실성이 떨어진다. 지난해 시민단체가 최저생계비로 사는 체험을 한 일이 있었는데, 체험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들은 입을 모아 생계유지조차 힘들고 문화생활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가 진정으로 가난을 구제할 의지가 있다면 최빈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최저생계비부터 현실성 있게 조정해야 할 것이다. 빚을 지지 않고 살 만큼의 최소한의 상황은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최빈자들의 빚 탕감에 눈길을 돌린 이참에 좀더 심도있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분명 일한 만큼 돈을 버는 것이 논리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이 논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먹고살기 위해 힘들게 일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기형적인 사회구조로 변형되었다. 기형적인 사회구조를 양산한 것에 있어, 정부의 책임은 피할 수 없다. 과거 정부의 분배보다는 성장 위주 경제정책, 균형보다는 발전에 급급한 정책이 낳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최빈자들의 빚 탕감이 신호탄이 되어 기형적 사회구조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김윤희/창원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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