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
‘반일’ 과 우리의 자주적 ‘일본관’ |
일본내 우익들의 행동은 우려할 만한 일이지만, 두나라의 교류는 앞으로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개방적이고 지속적인 교류만이 한-일 양국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는,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다.
과거 우리 사회를 지탱하던 안티테제(반정립)가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반공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일이었다. 이 중 반공사상은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반일은 여전히 우리들 의식의 밑바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 주요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이런 안티테제가 아직까지 우리 사회 저변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정의로운’ 한국과 대비되는 ‘정의롭지 못한’ 집단을 찾고 있는데, 지금 그 자리에 일본이 있는 것이다.
최근에 독도 영유권 문제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보도하는 언론과 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반응을 보면, 마치 모든 일본인이 대동단결하여 독도를 일본 땅으로 하려 하고, 일본의 모든 중학생들이 우익의 왜곡된 교과서로 배우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속내용이야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실상은 정반대이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독도(다케시마)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데 독도를 일본 땅으로 하려는 의지가 강할 리 없다. 우익의 교과서는 일본 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해 채택률이 지극히 미미하다. 언론 보도를 보면, 지난 2001년의 채택률이 0.03%에 불과했다고 한다. 최근의 모습은 일본에서 흥행 참패한 영화가 한국에서 대박을 터뜨리는 것과 같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기성세대들 역시 ‘요즘 젊은이들’이 애국심이 부족하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걱정하는 평범한 어른들이란 사실을 우린 잊고 있는 것 같다. 시마네현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제정 움직임, 우익단체의 역사교과서 왜곡, 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은, 일본이 일치단결하여 우향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우익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봐야 한다.
일본내 우익들의 행동은 우려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전국민이 들고 일어나 반일운동을 할 만한 사안이 아니다. 표적을 잘 골라 차분히 대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구시대적 반공사상에 젖은 일부의 망발로 한국 전체를 규정짓는 것이 온당치 않듯이, 일부 우익들의 망발로 일본 전체를 규정짓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우리는 은연중에 일본 우익의 눈을 통해 일본을 바라보고 있어, 일본 우익들의 잘못된 인식만큼이나 일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왜곡되고 뒤틀려 있다. 우익이란 안경을 보아야지 그 안경을 쓰고 일본을 보면 안 된다.
반일의 이유를 일본의 태도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반성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을 용서하면 안 된다는 논리다. 이런 생각은 일본이란 나라에 1억3천만명 가까운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지나치게 단순한 선악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일본이 어떤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분석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사실 반공사상이 옅어진 이유도 북한의 태도 변화 때문이 아니다. 북한은 얼마 전에도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런 발표가 있었음에도 우리나라에선 북한을 규탄하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반공사상이 이 땅에서 없어진 것은 북한이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생각을 ‘올바른 방향으로’ 그리고 ‘자주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런 전환은 우리에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생각의 여유를 갖게 하였고, 그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갖게 될 나라는 바로 우리가 될 것이다. 일본에 대해서도 그렇게 못할 까닭이 없다.
독도와 교과서 왜곡 문제로 ‘한-일 우정의 해’를 축소해야 한다거나 아예 파기해야 한다는 말들이, 심지어 국교를 단절해야 한다는 실현 불가능한 말까지 들린다. 하지만 그 어떤 악재가 생겨도 양국의 교류는 계속되어야 하며 앞으로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개방적이고 지속적인 교류만이 한-일 양국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는,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다.
이병관/충북 청주시 사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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