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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인혁당은 없다 / 도한호

등록 2007-02-05 17:26수정 2007-02-05 19:01

왜냐면
1975년 4월9일, 서울 하늘에는 황사가 자욱했다. 대낮인데도 낮게 드리운 구름과 황사 탓에 하늘은 어두웠고 날씨마저 추워서 마치 한겨울 같았다. 나는 건축업을 하는 삼촌의 부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갔다. 불길한 생각으로 문 앞에 이르자 실신한 숙모(신동숙, 도예종씨 부인)의 축 늘어진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인혁당’ 피고인 유족들의 비명과 절규가 메아리쳤다. 사법부는 사형선고를 내린 지 열여덟 시간 만에 여덟 명의 피고인 전원에게 사형을 집행했던 것이다.

시신을 찾아 대구로 귀향하는 길도 수월치 않았다. 정보요원들이 길을 막고 서울 홍제동 화장장으로 갈 것을 종용했고, 그래서 대부분의 유족들은 후환이 두려워 정보요원들의 권고(?)를 따랐으나 우리는 시신을 싣고 대구로 향했다. 시신과 함께 온 고인의 유품으로는 마른 칫솔 하나와 물빛 담요 한 장이 전부였다.

이른바 ‘인혁당’ 사건은 멀리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당시 공약으로 내세웠던, ‘군 본연의 업무로 돌아간다’는 약속을 어기고 총선을 거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당시의 보도 내용을 종합해 보면, 새로 구성된 내각과 권력구조로부터 소외되었거나 혁명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 인사들 중 일부가 독립 정당으로 정치활동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인혁당’으로 알고 있는 이 단체는 대구 지역 교사들이 모여서 시국과 경제와 남북관계를 토론하고 책을 읽던 단순한 학습모임이었다. ‘인민혁명당’이라는 명칭이 이 사건으로 처형당한 이들이 만든 게 아니라 공안기관이 만든 호칭이었다.

오늘 우리가 ‘인혁당’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알고 있는 이 단체는 대구 지역 교사들이 모여서 시국과 경제와 남북관계를 토론하고 책을 읽던 단순한 학습모임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964년에 이 단체의 구성원들을 반국가 내란음모 혐의로 검거해서 반혁명 세력과의 연계를 조사했으나 이렇다 할 혐의점을 찾지 못해서 석방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난 뒤 온 나라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 저지와 긴급조치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와 논쟁으로 들끓자, 공안당국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인혁당 인사들을 다시 검거해서 이번에는 인혁당 재건 혐의와 반국가 내란음모 혐의를 씌웠다.

당국은 인혁당 인사들이 과거 해체된 단체를 재건해서 북한으로부터 지령과 자금을 받아 이를 민청학련에 전달하여 정부 전복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인혁당 관련 인사는 물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민청학련 관계 학생들을 체포해서 대거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만난 일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는 것이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그로부터 32년이 흘러 지난달 23일, 드디어 이들에게 무죄가 선고되고 뒤이어 검찰이 항소를 포기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사필귀정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인민혁명당’이라는 명칭이 이 사건으로 처형당한 이들이 만든 게 아니라, 당시 공안기관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만든 호칭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문보도에도 최초 몇 번은 ‘가칭 인혁당’이라고 표기하다가 어느 날부터 ‘가칭’이란 말이 사라지고 인혁당으로 기정사실화됐다. 얼마나 많은 시대의 양심들이 인혁당이라는 이름으로 멸시와 박해와 죽임을 당했던가. 그러나 인민혁명당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름이다.

지난 2월2일치 <한겨레>에 실린 제성호 교수의 “인혁당 재건위 실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보도를 읽고 또 한 번 분노를 금치 못하는 바이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혁당을 누가 어떻게 재건하려 했단 말인가.


도한호/침례신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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