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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왜냐면] ‘인생 잘못 산 노인’의 입장에 서서

등록 2013-10-02 19:12수정 2013-10-04 15:32

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김용하 전 국민연금재정추계위원장이 “65살에 기초연금 받게 된다면 인생 잘못 살았다”라고 했단다. 국민연금을 주기가 아까워서 한 말인지, 아니면 이런 사정에 있는 노인들의 삶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이 말을 하셨다는 전 국민연금재정추계위원장이란 분도 50살은 넘은 분이고, 자신도 베이비 부머에 속하는 분이다.

김 전 위원장이 한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다. 듣기에 좋지는 않지만 그의 말대로 분명 잘못 산 인생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잘못 살았다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런 말을 한 그분이 더 잘못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1964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42년간 근무하였기에 내가 담임을 맡았던 어린이들은 1953년생부터 1978년생까지였다. 베이비 부머 모두와 그 언저리 더 넓은 시대의 어린이들을 맡아서 보아온 셈이다.

처음 졸업시킨 68년 졸업생은 55년생들로 베이비 붐 첫해에 해당하는 어린이들이었다. 당시에는 중학교도 입시를 보아야 했기에 학교에서 200일 동안 합숙하면서 교실에서 자고 먹으며, 도시락을 싸오기 위해 집에는 잠시 다녀오는 생활을 했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관내 중학교 입학 정원이 많지 않아 20% 정도만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면내에 있는 무인가 중학교인 고등공민학교에 진학한 어린이들까지 모두 합해도 약 30%가 겨우 중학 과정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농촌 학교의 경우 대부분 20%를 넘지 못했다.

농촌 지역의 나머지 70~80% 어린이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13살의 어린 나이에 산업 전선,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당시는 공장 같은 것도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여자 아이들은 식모살이(요즘은 이런 이름도 없지만)를 하거나 가발 공장, 봉제 공장에서 일했고, 남자 아이들은 공장 심부름꾼이나 점원으로 하루 14~15시간의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제대로 봉급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공장이나 가정에서는 어리니까 일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밥이나 먹여주는 조건으로 일을 시키곤 했다. 이런 생활로 몇년간이나 공짜로 일을 시키고 나서야 일이 익숙해지면 약간씩의 봉급(용돈 수준의 봉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배워서 기술자가 되고, 공장에서 중요한 일자리를 차지하게 되기까지 20~30년이나 걸렸다. 그들은 충분한 봉급을 받아본 적도 없이 요즘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그런 근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악조건을 이겨내며 일을 했다. 이런 막장 인생을 살아온 그들의 힘과 피땀 어린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산업은 발전하였고, 그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부모 봉양하고 자식 가르쳐서 대부분 대학 교육까지 시켜온 그들이다. 못 배워서 한이 된 그들은 자식만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더 악착같이 자식 교육에 매달렸다.

그렇게 죽도록 일하다 보니 이제 나이 들었다고 직장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의 노후를 위해 준비를 해두지 못해서 기초연금이라도 타야 살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자, 이들에게 ‘당신들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손가락질을 해야 하겠는가. 이들의 인생을 얼마나 알아서 그들이 잘못 살았다고 할 수 있는가. 지금 노령연금에 의탁해야 하는 그들이 부자가 되기 싫어서 가난한 것도 아니고, 일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지 않는가. 아마도 일을 한 양으로 따진다면 이런 말을 한 그분보다 몇배는 더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못 배운 것이 굴레가 되어 인생 내내 가난을 벗 삼아 살아왔고,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 보려고 남보다 더 많은 노력도 해보았던 사람들이다. 허송세월하기는커녕 눈코 뜰 사이도 없이 열심히 달려온 그들이다. 그런 그들이 인생을 잘못 살았다니, 비록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우승의 월계관을 쓰지는 못했어도 자신의 능력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해온 그들이다.

누가 감히 그들에게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돌팔매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말이야말로 인격 모독이요, 인격 살인이다.

김선태 노년유니온 위원장·한국아동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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