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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함께 사는 세상의 대화술 / 최에셀

등록 2015-01-28 18:54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살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첫인상이나 느낌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속마음에 담아 두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그러한 경우는 많지 않다. 그때의 속마음은 아주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들에게 사소한 것이 늘 사소하게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만남과 접촉이 거듭되면 그런 속마음이 모여 감정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감정들은 시각과 결합해 상당히 빠른 반응 속도를 갖는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다’, ‘보자마자 짜증이 났다’는 표현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런 반응은 비단 사람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마주치는 모든 것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시각과 감정이 만들어낸 해석은 ‘이미지’라고도 한다. 이미지가 구체화된다는 건 대상에 대한 수많은 속마음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끄럼틀을 생각해보자. 처음엔 그저 놀이기구일 뿐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다 발견한 해 질 무렵의 붉은 하늘, 밥 먹으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 미끄럼틀 아래에 떨어뜨렸다 끝끝내 찾지 못했던 오백원짜리 동전 등 수많은 시간과 경험의 켜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포개어진 속마음들은 미끄럼틀이 단순한 쇳덩이 이상의 의미를 갖게 만든다.

미끄럼틀에 농밀히 살붙이된 이미지에는 에너지가 있다. 어려운 일을 겪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주한 그것에 예상하지 못한 힘을 얻는다. 지나간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서 다가올 시간의 앞에 부드러운 카펫을 펼친다. 험난하고 고단한 길에서 잠시 벗어나 거칠어진 발을 잠시 쉬게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이미지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속마음은 저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미끄럼틀을 보고 힘을 얻진 않는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같은 것을 떠올리진 않는다.

이미지를 공유하는 일은 그래서 효율성이 떨어진다. 정확한 정보나 사실보다는 속마음과 감정이 강조되는 건 쑥스러울 뿐만 아니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대화가 다양한 계산과 합리적인 판단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한마디 말을 꺼내기 전에도 그 뒤로 따라올 반응과 효과를 미리 생각한다. 이 대화에서 속마음은 없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들려주려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듣기 위한 대화는 내부의 마음과는 아득히 멀고, 혀에 고인 침보다 외부적이다. 외향성을 강조하는 사회니, 이 또한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무얼 한단 말인가. 세간에 넘쳐나는 수많은 처세술에 관한 책들은 그를 통해 돈과 명예 따위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성(異性)이라고도 한다. 이들에게 ‘함께’는 ‘경쟁’과 동어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엄밀히 말해 살아가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돈, 명예, 이성이라는 목표는 미래를 지향하지만, 삶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 사는 것은 무엇보다 현재에 최적화된 단어이면서도, 때문에 가장 회고적이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냐면”이라고 말을 꺼내는 순간도 즉시 과거가 되며 회고된 삶이 현재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간 삶과 지나갈 지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오래된 것은 다 아름답다.”

목표를 위해 본질을 버리려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오래되어 세련미가 떨어진 대화술을 권하고 싶다. 맥락 없이 속마음을 꺼내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대화술의 기본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와 시간이 중첩된 자신만의 낡은 이미지들을 꺼내는 것이다. 상대방의 반응에 대한 고민도, 자신이 우스워 보일 거라는 걱정도 필요없다. 그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누군가 재거나 평가할 수 있는, 평면적이거나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감추어진 속마음이 누군가의 그것과 반응하면 진정한 교감과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화술이 아닐까.

최에셀 서울시 동작구 양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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