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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왜냐면] 미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판결과 한국 사회 / 신희석

등록 2015-07-06 18:55

“실체적 연방 사안이 없으므로 항소를 기각한다.”

1972년 10월10일 미국 연방대법원의 한 문장짜리 판결문. 1970년 법대생 잭 베이커와 그의 동성 파트너 마이클 매코널이 결혼 신청을 거부한 미네소타 주정부를 상대로 연방헌법상 기본권의 위반을 주장하며 제기했던 소송(베이커 대 넬슨)의 허무한 결말이다.

당시의 미국 사법부는 선거구 획정, 인종평등, 인권보호 등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개혁적이었고, 대법원의 구성도 더 다양했지만 9-0 만장일치로 베이커와 매코널의 청구를 기각하면서 동성혼 금지가 왜 합헌인지 설명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반세기가 흘러 2015년 6월26일 미 연방대법원은 5-4 표결로 베이커 판례를 공식적으로 뒤집으면서 동성결혼이 연방헌법이 보호하는 권리라고 판결했다. 이번 오버거펠 판결로 미국 내 동성결혼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렇다고 미국 대법관들이 특별히 선구적이라거나 용감하다고 치켜세울 필요는 없다. 이미 미국인의 60% 이상이 동성결혼을 지지하고 있고, 지금 추세대로라면 가장 보수적인 주들조차 수년 안에 찬성 다수가 될 테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동성혼 반대론자들을 이상하게만 여길 필요도 없다. 30년 전만 해도 동성결혼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언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까 하는 수준의 농담거리에 가까웠다. 1993년 하와이주 대법원이 동성결혼 허가를 시사하는 베어 판결을 내리자 하와이주는 이를 막기 위해 주헌법을 개정했고, 2000년대만 해도 전국적으로 연방헌법 개정이 논의되었다.

지금 오버거펠 판결에 환호하는 사람들 중 100년 전에 동성결혼을 지지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반대로 반대자 대부분도 100년 뒤라면 옛날 사람들은 왜 이런 걸 가지고 논쟁을 벌였을까 의아해할 것이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반대 다수였던 미국 여론의 급변이다. 여기에는 사회 가치관, 가족 형태의 변화 등의 요인이 있겠지만 반대파, 특히 기독교인들이 동성결혼의 여파를 과장했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지 않았나 싶다.

동성결혼 반대론의 핵심은 동성결혼 허용이 이성결혼을 근간으로 하는 기존 가족제도를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미국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할 것이라는 극언까지 나왔다.

그러나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주가 미국 최초로 주 대법원의 굿리지 판결에 따라 동성결혼을 전면 허용한 2004년 레드삭스는 86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동성혼을 허용한 다른 주들도 망할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이성 커플의 결혼(및 이혼)에도 당연히 영향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왜 굳이 동성결혼을 금지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결국 결혼을 이성간의 결합으로 규정했던 전통과 관습법 외의 “합리적 이유”로는 출산과 양육을 위한 법적 안정성 정도가 남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런 공공정책을 이유로 불임 부부는 결혼을 취소시키고, 가임기를 지난 연령대는 결혼을 제한해도 되는 것일까? 더군다나 ‘결혼=출산’ 공식이 깨진 요즘에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지, 출산 준비 수순이 아니다.

그렇다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동성결혼 인정 추세를 한국 사회, 특히 동성결혼 반대자는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

첫째,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한국의 사회 분위기상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려면 강산이 몇번은 바뀌어야 할 것이다. 다만 미국 가서 동성결혼은 죄악이라 생각한다는 유의 “커밍아웃”은 자제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둘째, 반대 목소리를 드높일수록 논의는 “왜 동성결혼을 허용해야 하나?”에서 “왜 동성결혼을 반대하나?”로 옮겨갈 것이다. 한마디로 입증 책임이 찬성파에서 반대파로 넘어간다. 셋째, 특히나 동성혼 망국론은 제 무덤 파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갈수록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나라들은 늘어날 텐데, 그런 나라들이 계속 번성하면 반대 논리가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합법화된 나라들이 한국인들이 대체로 선망하는 서구 선진국들이니 더더욱 그렇다. 넷째, 무턱대고 반대만 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니다.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힘없는 동성애자를 못 괴롭혀서 안달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동성 커플의 결혼에 반대하더라도 이들이 사회보장, 조세, 임대차, 비자 신청 등에서 겪는 현실적 고통을 줄이기 위한 법제도 개혁에 동참할 수 있다.

독일, 스위스처럼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에서도 동반자 등록제로 이러한 법적 불이익을 상당 부분 해소시키고 있다. 동반자 등록제는 이성 커플의 경우에도 결혼의 대안으로 허용하면 출산을 장려하고 이혼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선진국의 동반자 등록제, 시민 결합 같은 “유사 결혼”이 여전히 차별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어차피 동성결혼이 당장 허용될 가능성이 전무한 한국에서 동성 커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동성결혼 반대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동성결혼 요구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안이라 할 수 있다.

동성결혼처럼 개개인의 가치관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에서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안일수록 우리 공동체가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하기 위해 합의의 정치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신희석 서울시 양천구 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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