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에는 이색적이지만 경청할 만한 강력한 주장이 들어 있습니다. 저자는 전반적으로 띄엄띄엄 알려진 이오니아 자연철학자들의 사상을 ‘이소노미아’(무지배)라는 원리를 통해서 독해하고 소크라테스를 이오니아의 사상과 정치를 회복하려고 한 최후의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저자의 목표는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그 가능성을 ‘이소노미아’와 그것이 실현되었던 기원전 7세기 무렵의 이오니아에서 모색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근본원리는 ‘운동’ 혹은 ‘변화’입니다. 운동 혹은 변화는 인간 세계를 포함한 자연의 유일한 원리이며, 따라서 이것을 조종하는 별도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민의 자유란 ‘이동할 수 있는 자유’이며 이것이 가능하려면 항구적인 교환관계에 예속되지 않아야 합니다. 때문에 수의 세계를 실제로 보고 진정한 세계와 가상의 세계를 나누었던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이중세계를 부정한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운동이나 변화를 부정한 것으로 알려진 파르메니데스나 그의 제자인 제논이 정반대로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역설의 목적은 피타고라스와 같은 관점에서 운동을 분할한다면 운동이 불가능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연속체가 무한히 분할된다고 가정하면,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따라잡는다. 그러므로 연속체는 무한히 분할할 수 없다. 즉 세계는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인 유(有)’가 된다. 즉 운동으로부터 분리된 물질을 사고하는 것은 잘못이다.”(162쪽)
저자의 말이 옳다면 미적분학이 제논의 역설을 해결했다는 식의 이해를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미적분학은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공간의 무한 분할과 시간의 무한 분할을 고안했습니다. 공간의 무한 분할과 시간의 무한 분할이 결합되면 결국 운동은 분할 불가능한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으로 씌어 있다’고 본 갈릴레오나 데카르트의 사고방식은 피타고라스로부터 이어지고, 운동을 기술하는 미적분학은 이오니아 자연철학으로부터 이어진다고 해야 타당할 듯싶습니다.
요즈음 숱한 수포자(수학 포기자)를 양산하는 주범으로 ‘어려운’ 수학을 적시하고, 특히 고교 교육과정에서 그 ‘어려운’ 수학인 미적분을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어떤 것을 어떤 교육 과정에서 배우는 게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는 분명 필요할 것입니다. 다만 미적분학과 연계성이 깊은 물리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미적분학(의 개념) 없이 운동을 기술하는 역학을 설명하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물체의 운동에 국한되긴 하지만 물리의 역학을 배운다는 것은 어쩌면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일부나마 배우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배우는 수학은 그저 추상적이지만은 않으며 다양한 사상들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넣고 뺄까보다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논의나 반성이 우선이 되지 못하는 세태가 아쉽기만 합니다.
한편으론 미적분학이 고교 과정에서 없어진다면 정말로 수포자가 사라지고 많은 고교생들이 수학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될까도 싶습니다. 실제로 학생들이 수학을 기피하는 것은 대학 입시, 혹은 학벌 구조 속에서 수학이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요? 요컨대 미적분학이 고교 과정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수학이 다른 교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렵다면 여전히 기피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주된 목적이 서열화된 대학 입학에 있다면, 어려운 것을 줄이거나 쉬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근본 처방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고교 수학에서 미적분학이 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학생들은 수학 문제풀이에 시달리며 학원에 다니지 않을까요?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은 자연학자인 동시에 정치가이자 기술자였으며 노동을 긍정하였고 노예제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진실로 자연에 대한 실천적 인식이 가져온 결과일 것입니다. 고교 교육과정에서 미적분학을 넣고 빼는 일만으로 아이들의 사고력이나 안목이 크게 달라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세계와 더불어 사유했던 인류의 유산으로서 미적분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라는 질문을 좀 더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배워서 알게 되기 전까지 모르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려운 법이니까요.
정혁 경기 수원시 금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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