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장애’는 최근 등장한 신조어로, 선택의 상황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점심 메뉴로 자장면, 김치찌개, 비빔밥을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점심때가 지나서야 허겁지겁 식사하는 경우가 예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 누군가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요즘, 선택장애는 온라인 곳곳에서 ‘결정해주세요’와 함께 등장하는 단골 해시태그(#)다. 이렇게 선택장애가 부각되자, 언론과 방송이 선택장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언론이 청년의 과감한 결정,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 도전하는 자세 따위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택에 대한 고민이 없다. 선택의 문제는 오늘날에 한정된 특이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다만 권위에 의해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을 뿐이다. ‘부장님과의 식사에서 모두 자장면으로 통일하자’고 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과거에는 이런 방식의 결정이 회사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 전체를 지배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한 결정 그리고 결정자가 가진 힘 앞에서 어떠한 선택권도 없이 복종해야 하는 선택의 주체들. 그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를 찾기 위해 저항하였고 마침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예스, 아이 캔’(Yes, I can) 세대가 등장한다. 그들은 ‘리더가 되어라’ ‘글로벌 인재’ ‘세계로 진출하라’와 같은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수식어에도 그들은 리더가 아닌 인턴, 비정규직이 되었고, 세계가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탄다. 많은 청년이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다. 저항해야 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자유를 막는 주체가 명확했다. 그것은 실체가 있었고, 인식하기 용이했다. 하지만 오늘날 청년이 저항해야 할 대상은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청년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허튼 생각 말고 공부하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공부의 목표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는 것이 되었다. 정규직이 되는 것이 성공이 된 사회에서 청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자격증, 공모전, 봉사활동, 어학연수, 인턴, 성형 등으로 비슷한 것들뿐이다. 여기에서 선택장애가 등장한다. 작은 차이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른다면, 그 차이는 더 이상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을 사용해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해야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장애는 청년들의 생존 고민이 실체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선택은 문제인식-토론-결정의 고리를 순환한다. 이 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토론, 즉 고민의 순간이다. 무엇을 고민하느냐에 따라 문제에 대한 답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지금 고민의 순간에 놓여 있고, 그들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기성 언론은 청년들의 고민은 무시한 채 그들을 눈만 높은 겁쟁이라고 하며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은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왜 그들은 더 고민해도 괜찮다고 격려하지 못하고 다그치는 것일까? 청년들의 고민이 두려운 것일까? 문제의 원인을 찾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고민의 힘은 그만큼 거대하다. 청년들이여, 더 치열하고 역동적으로 고민하자.
임정웅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세지로42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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