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9월 우리는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문제로 찬반 진영 간 격한 갈등과 대립의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 9월24일 교육부에서 발표한 ‘문·이과 통합형 교과과정의 총론 주요사항(시안)’ 내용에 포함된 ‘한자교육 활성화 방안’은 오래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국한문혼용’과 ‘한자병기’ 같은 해묵은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한겨레> 보도를 보면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여부는 거센 반대 목소리와 연구 부족에 대한 각계의 질타에 밀려 그 결정이 1년 뒤로 연기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1970년 초등교과서에서 한자를 폐기한 뒤 45년 동안 문제없이 정착돼온 정책을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가 지금 왜 새삼 문제가 되는지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 데 있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말글생활에서는 한자를 배워봤자 한자 관련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외에는 쓸 일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자를 초등교과서에 끌어들이겠다며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생 시기는 올바른 국가관과 가치관이 만들어지는 시기다. 한자가 병기되면 어린 학생들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되고, 우리 것의 소중함을 잊게 될 뿐만 아니라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잃게 될 것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환경에서 한자는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요즘 중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은 한자를 잘 못 쓴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람들은 정보기술의 혜택으로 그저 알파벳 발음기호(병음)만으로 해당하는 한자 목록을 화면에 띄워 그 가운데 필요한 글자를 고르기만 하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자판에 더 익숙해지면서 한자를 직접 손으로 쓸 필요를 별로 못 느끼고 있다. 어려운 한자를 기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끊임없이 손글씨를 쓰는 것인데 자주 쓰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속도와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중국과 일본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번체자)를 배워봐야 기존 한자의 획수를 줄인 중국의 간체자와 통하지 않을뿐더러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힘들게 배워도 디지털 환경에서 한자는 결국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영어 교육을 도입할 때도 교육부는 ‘사교육을 줄이겠다’면서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영어 조기교육과 사교육 열풍이 여전히 거세게 불고 있고,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도 영어 사교육비를 대느라 학부모들의 허리가 휘고 있으며, 영어를 둘러싼 사교육 시장은 정부가 감당하기 버거운 거대한 공룡이 되어버렸다. 초등교과서 한자병기도 이와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아무런 명분도 실익도 없이 한자 관련 이익단체들에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방침은 시작부터가 잘못이었다. 따라서 교육부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간의 일 처리가 졸속적이고 무모했던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한자병기 방침을 완전히 폐지해야 할 것이며, 유보 정도의 미봉책으로 이 문제를 얼버무리고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규석 한국전문번역사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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