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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한글, 완전한 독립을 향하여 / 김영환

등록 2015-10-07 18:46

교육부가 지난해 9월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겠다면서 해묵은 시비에 다시 불을 지폈다. 정부의 말글 정책이 한글 전용이라고 알려져 있고 대중의 말글 정책에 대한 관심도 한글 전용 문제에 집중돼 있다. 광복 직후에 결정된 초등 교과서에서의 한글 전용은 당시로서는 무척 혁신적인 결정이었다. 부분적으로 이에 거스르는 흐름이 있었으나 한글 전용 교육만은 연속적이었고, 이것이 오랜 한글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깨뜨린 동력이 되었으며, 오랜 한자 한문에 대한 숭배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글만 쓰기로 놀랄 만한 정보 소통의 속도를 자랑할 수 있고 문자 쓰기의 대중화를 이룰 수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한글 전용이 번져나가 일간 신문에서 한자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이것도 뜻이 있기는 하지만 한글 전용의 본디 뜻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완전한 한글 전용, 한글 독립은 영어투성이 문장이나 한자말을 그냥 한글로만 적는 데 그치지 않고, 새말을 토박이말을 재료로 삼아 어휘 체계를 세워나가야 이루어진다. 한자말 중심의 어휘 체계가 줄어드는 것은 좋으나 영어가 자꾸 늘어나서 문제다. 한글만 쓰기의 도도한 추세에도 우리말과 글을 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때, 소동을 빚었던 ‘영어 공용화’ 문제도 우리 지성사를 보면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참글자를 뜻하는 ‘진서’는 왕조 시대에 학문과 교육의 하나뿐인 매체였으며 언문은 소설이나 편지와 같은 사적 영역에서만 쓰는 글자였다. 전통적으로 말글 의식을 지배하던 ‘동문’ 의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중국과 같은 글자를 써야 오랑캐를 면한다는 동문 의식은 가장 훌륭한 알파벳을 400년이 넘게 제대로 되돌아보지도 않게 만든 원인이었다. 우리말을 일컬었던 ‘방언’이란 표현은 조선이 천하 체제에 귀속됨을 전제한 표현이다. 모두 극심한 모화사상의 표현이다. 이런 낡은 개념들은 모두 한글에 대한 두터운 무지와 편견의 굳건한 성벽을 이루고 있었다.

1945년 이후에도 우리말과 글을 얕보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동문 의식이 모방의 대상을 바꾸어 영어공용화로 나타났다. 영어몰입 강의나 외국어로 논문을 내면 업적 평가에서 여러모로 유리한 대학교수들도 지난날의 ‘언문’ 의식을 물려받기 쉽다. ‘국제화, 세계화’ 담론이 영어 숭배와 연결되었던 사실에서도 우리말을 ‘방언’이라 여기는 태도가 깃들어 있다. ‘언문’은 학문에 방해된다는 주장은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보이는데, 중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학문의 언어와 나날삶의 언어가 분리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학문이나 교육이 우리말글 천대의 명분이 되고 있는 현실은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우리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가난한 번역 문화의 전통이 큰 원인이지만, 외래 학술 용어나 전문 용어를 받아들일 때도 그 뜻을 살려 새로 창작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들여오는 태도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비행기를 ‘날틀’ 식으로 바꾸자는 것이냐며 흥분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제는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경성제대에서 서울대로 이어지는 이른바 ‘과학적’ 국어학을 내세우는 교수들이 언어의 자연성을 내세워 이런 낱말이 인위적이라고 반대에 앞장섰다. 그렇지만 언어, 특히 어휘는 문화적인 산물이고 가장 쉽게 변하는 곳이지 자연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새말의 창조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잘 드러날 수 있다. 물론 새말이 만들어지고 번지는 과정은 사회적인 과정이어서 개인의 노력이 한계를 갖지만 그 사회성이 개인의 창조적인 노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과 한글의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모화사상에 바탕을 둔 낡은 말글 의식과 해방 뒤에도 자꾸 번져간 경성제대의 ‘과학적’ 국어학을 청산해야 한다. 완전한 한글 독립은 곧 한글로만 쓰기뿐만 아니라 창의적인 새말 만들기로 완성된다. 이것은 우리말과 글로 생각하고 가르치고 배우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에 속한다.

김영환 한글철학연구소 소장, 부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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