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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선거벽보

등록 2016-03-21 18:30수정 2016-03-21 19:49

‘선거’란 재야의 인재를 가려 뽑아 조정에 들이는 것이다. 시험을 쳐서 뽑는 것이 ‘과거’고, 믿을 만한 사람의 추천을 받아 뽑는 것이 ‘천거’다. 어떤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뽑아 쓸지 결정하는 것이 ‘선거권’이었으니, 이것이 곧 주권이다. 전제군주국에서 선거권은 왕과 그에게 위임받은 고위 관료만이 행사할 수 있었다. 주권이 왕에게서 민으로 이전된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는 추천받은 사람들 중 누구를 뽑아 쓸지를 다수결로 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결정 방식이 투표다.

우리나라에서 공직자를 투표로 선거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조선총독부가 3·1운동 사후 대책으로 명목상의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면서부터다. 당시 선거권은 연간 5원 이상의 세금을 내는 25살 이상의 남자만이 가졌으며, 조선인의 경우 대략 1% 정도가 이에 해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함에 ‘경성부협의회원’ 등의 글자를 박아 넣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후보자가 자신을 알리기 위해 벽보를 만들어 거리에 붙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말로 추정된다. 1929년 선거벽보 훼손 사건이 발생했는데, 경찰은 어떤 법을 적용해 ‘범인’을 처벌해야 할지 몰랐다. 1930년에는 <매일신보>가 일본 총선거에서 사용된 선거벽보들을 모아 ‘선거포스터 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국 성인 모두가 평등한 선거권을 갖게 됐고 선거벽보도 공보(公報)가 됐다. 다른 민주국가 국민들이 지난한 투쟁을 통해 평등 선거권을 얻었던 데 반해,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를 독립에 따라붙은 ‘덤’ 정도로 생각했다. ‘덤’은 싸구려인 게 상례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벽보를 자기에게 고무신을 준 후보의 얼굴과 ‘작대기 수’를 확인하는 용도로만 이용했다.

지난 70년간, 선거 때면 수많은 선거벽보가 전국 골목골목에 나붙었다. 이 기간 중 선거벽보의 질은 계속 높아졌고 제작 단가도 올랐으나, 투표권의 가치는 전혀 높아진 것 같지 않다. 그를 신발 한 켤레 정도로도 여기지 않는 유권자가 여전히 많으니 말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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