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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여성 없는 평화협상은 모래성 / 이진옥

등록 2018-05-23 18:19수정 2018-05-23 19:58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

5월24일은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이다. 1980년대 초 서구의 반핵운동에서 유래한 이날은 이제 세계 각지에서 평화 만들기에 매진하고 있는 여성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날로 지난 23년간 기념되어 왔다. 이날을 세계적으로 가장 유의미한 행사로 만든 것은 2015년 ‘위민 크로스 디엠제트’(WomenCrossDMZ)다.

저명한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머레이드 매과이어, 리마 보위 등 세계 각지의 여성 평화운동가 30여명이 분단 70주년을 맞이한 2015년 5월24일 북에서 남으로 중무장된 비무장지대(DMZ)를 도보로 넘은 사건은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의 가장 기념비적인 행사가 되었다.

위민 크로스 디엠제트 국제대표단과 약 1만여명의 남북한 여성들이 함께 평화 걷기에 참여했다. 그들은 평화협정 체결, 이산가족 재결합, 한반도 군사적 긴장 완화, 제재조치 철회, 여성에 대한 전시폭력 금지 및 ‘위안부’ 여성을 위한 정의의 회복, 군사 비용의 복지 및 환경 보호 비용으로 전환, 평화 구축 과정에서 여성의 리더십 확대, 한반도 화해와 통일을 위한 전세계인의 지지 촉구 등을 주장하였다.

한국 정부의 경로에 대한 확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위민 크로스 디엠제트 대표단은 편도 티켓을 끊어 중국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갔고, 개성에서 도라산역을 통과해 ‘입경’을 감행하여 한국 여성들과 함께 비무장지대를 걸었으며, 전세계의 평화운동을 함께 말하고 배웠다. 당시 이 활동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이끌었던 것과 달리, 한국의 여론은 이 행사를 기획한 크리스틴 안에 대한 종북몰이에 주력하며, 이 행사의 의도와 취지를 폄하하는 데 집중했다.

‘전략적 인내’라는 명분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전면 거부했던 당시 오바마 미국 행정부와 ‘통일대박’을 선전하면서도 북한과의 어떤 교류도 차단한 박근혜 정부 아래서 고립된 북한은 위민 크로스 디엠제트를 적극 지원해 대화의 의지를 세계에 내비쳤다. 그러나 남한 정부는 국가정보원과 탈북자를 동원해 이 행사를 훼방 놓았다. 200여명이 몰린 도라산역 기자회견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계란 투척을 준비하다 쫓겨났다. 걷기 참여자보다 훨씬 많은 수의 경찰 병력과 반대 시위자들로 평화 걷기는 무력과 겁박의 언어로 도배되었다. 다음날 국제여성평화심포지엄에서 또한 예기치 않은 탈북자의 비판 발언 이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수많은 카메라 기자들은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정부의 훼방과 공작이 여성 평화 걷기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오방색의 스카프와 해외 여성과 북한 여성, 다문화 여성 수천명이 함께 바느질로 완성한 10미터 대형 조각보로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은 도색되었다. 2015년 이후에도 5월24일을 기념한 여성 평화 걷기는 계속되어 왔고, 2018년 위민 크로스 디엠제트 국제대표단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기 위해 다시 비무장지대를 걷는다. 여성 평화 걷기는 현재 한반도 평화 무드의 마중물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평화협정을 만드는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는 지금, 국제대표단은 오히려 북한으로 갈 수 없으며, 남북 여성이 만날 수 있는 통로는 봉쇄되어 있다. 여성은 평화 만들기에 항상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으나, 남성 대표자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행사되는 국제 외교의 무대에서 다시금 잊히고 삭제된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참여 없는 평화협상은 남성 기득권의 논리에 항상 위협받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약속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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