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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24 16:20 수정 : 2019.04.24 19:00

<연합뉴스> 자료.

<연합뉴스> 자료.
루렌도씨, 안녕하세요? 벌써 선고날이 되었네요. 법원에서 출입국청으로 돌아갈 때였죠. “Bon courage, les Lulendo”(루렌도 가족 힘내세요), “Nous allons gagner”(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쓰인 난민공동행동의 불어 팻말을 보더니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당신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요. 너무 귀엽고 똘망한 눈을 가진 당신의 네명의 자녀가 넉달이 넘는 공항 생활로 아프진 않은지요?

루렌도 가족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인정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내셨지요. 난민 심사를 받을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이 소송 선고일이 바로 오늘(4월25일)이네요. 출입국청은 “당신의 입국 목적에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알아보니 당신과 가족이 왜 그곳을 떠나야 했는지 이해하게 됐습니다.

사실 콩고 출신 분들이 앙골라에서 받는 일련의 차별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더군요. 앙골라와 콩고는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가 개입한 전쟁을 치렀더군요. 이 전쟁에서는 각 지역의 맹주들이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죠. 1998년에는 8개국이 뛰어든 아프리카판 세계전쟁인 제2차 콩고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1994년의 인종청소처럼 후투 대 투치의 대결구도로 다시 변질됐죠. 그런데 콩고 내전의 계기가 된 후투족과 투치족이 갈등하는 데서 벨기에와 독일의 책임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농사를 지었던 후투족과 유목을 했던 투치족은 벨기에, 독일 등이 중동부 아프리카로 들어오기 전에는 종족 간 혼인이 빈번할 정도로 사이좋게 지냈다죠? 농사를 짓다가 가축을 키우거나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등 직업 간 교류도 빈번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벨기에는 르완다 지역에서 투치족은 키가 크고 코가 높다면서 우수 민족으로, 후투족을 열등 민족으로 구별하기 시작했다죠.

많은 역사가들이 입을 모아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극심한 형태로 사리사욕의 희생양이 된 곳으로 콩고를 들더군요. 콩고를 여행한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에도 그 탐욕이 잘 묘사돼 있더라고요. 20세기 초 콩고인들의 노동을 통해 추출된 생고무는 유럽과 미국에서 발흥하던 자동차 산업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원료였죠. 회사는 고무를 채취하기 위해 원주민 집단을 겁박했죠. 저는 손이 잘려나간 콩고인들 사진을 유튜브에서도 봤는데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오죽하면 1880년대부터 1920년대 사이에 콩고 인구가 약 30~50% 줄었을까요. 그런데 유럽을 먹여 살린 거나 다름없었는데도 콩고는 더 큰 비극에 휩싸였더라고요. 콩고인의 존경을 받던 첫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는 고문을 당해서 죽고 독재자 모부투가 1965년에 쿠데타로 장기집권하면서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됐죠.

더 슬픈 것은 아프리카의 국가 지배층도 강대국들의 그 간악한 이간질 통치를 재활용하여 미움과 복수의 통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이아몬드 매장지를 서로 차지하려 하면서 말입니다. 앙골라 지배층이 콩고 출신을 차별하고 억압하면서 안정적인 통치를 꾀하려는 것도 그 사례이겠습니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한달 동안 앙골라에서 쫓겨난 콩고인이 자그마치 33만명에 이른다죠. 루렌도씨, 당신은 단지 당신이 몰던 택시가 경찰차와 부딪혔다는 이유로 영장도 없이 특수경찰에게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죠.

당신이 감옥에 가 있는 동안 당신의 부인이 경찰로부터 강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공포스럽고 절망적이셨을까요? 법정에서 당신은 “그때 외국으로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하셨죠. 저는 한국이 난민 수용국 꼴찌인 일본을 따라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선고일에 반드시 자유의 몸이 되길 바랍니다.

김어진 ‘난민과 손잡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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