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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12 16:29 수정 : 2019.06.13 13:39

서동용
변호사

어느 날 <전라도닷컴> 사무실에 들렀다가 한편에 쌓인 책 더미에서 <스무살 도망자>를 발견했다. 안 팔리고 남은 책이라고 했다. 몇권이라도 팔아줄 욕심으로 집어 들었는데, 책장을 넘기자마자 이내 생각이 많아졌다.

저자 김담연(가명)은 1961년 순천 태생이다. 1980년 5월 대학 신입생으로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의 시위에 참여했다가 계엄군의 집단발포 현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저격당한 시위대의 참혹한 주검을 목도한 뒤 자진해서 총을 든 시민군이 되었고, 고립된 도시에서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특별한 공동체를 체험한다. 땀에 전 옷을 갈아입기 위해 하숙집에 잠시 들렀다가 목숨을 걸고 순천에서 광주까지 온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광주 대탈출’ 대열에 합류한다.

목숨 걸고 들었던 총을 내려놓고 동지들을 버린 채 광주에서 도망친 저자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나 그 자살 기도는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집안의 비밀로 봉인되고, 작가는 ‘정신적 총살’을 당한 채 37년간 중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그해 오월 순천으로 탈출하며 달렸던 비포장도로를 발견해내고 자신의 기억을 세상에 알리기로 한다.

책에는 그해 오월 광주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아 광주로 향하는 작가의 아버지 모습도 그려진다. 아버지는 광주로 향하던 택시 안에서 여순사건을 떠올린다. ‘여순반란사건’(아버지 때 용어는 그랬다) 때 아버지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18살 젊은이였다. 순천과 여수에서 젊은이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거나 학살하는 토벌군을 피해 아버지는 곡성 태안사 뒷산에 숨어 지내야만 했다.

“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해 오월 나의 부모님이다. 이제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지만 부모님께 뒤늦게나마 진상을 고해야 했다.” 작가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여순사건으로 강한 트라우마를 안고 세상을 살았을 아버지의 눈에 그해 오월의 광주는 1948년 순천시내였고, 광주의 외곽을 둘러싼 계엄군은 그때의 토벌군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터에서 아들을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는 아버지의 열망은 아들의 디엔에이(DNA)에 또 다른 트라우마로 변이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그해 오월은 1948년의 여순, 그리고 오늘에 닿아 있다. 역사는 도도한 시대의 흐름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픈 역사는 개개인의 삶 속에 낙인을 남기고 삶을 파괴한다. ‘스무살 도망자’가 그렇듯 1948년을 겪은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고흥, 보성 사람들의 삶도 그러했다.

그나마 5월 광주에 대해서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1948년 여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야기는 꺼내기 힘든 사건이다. 최근 대법원이 여순사건 당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했던 피고인 세명에 대해 재심 개시를 확정했다. 그러나 재판을 통해 밝혀질 진실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재판이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형식성과 증명의 정도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반란군에 동조했다’는 아무 근거도 없는 이유로 잡혀서 재판 없이 즉결처분된 사람의 숫자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런 죽음은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그 피맺힌 역사의 진실은 새로운 특별법을 통해 밝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진실은 기록보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더 생생할 것이니,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여순사건 당시 20살이었던 청년은 지금 91살이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송강호의 택시 뒷좌석에 타고 있던 그해 오월의 젊은이를 불러냈듯, 이제 우리가 1948년 쑥대밭이 된 순천시내에 선 아버지를 불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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