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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9 17:42 수정 : 2019.09.10 14:10

2008학년도 대입전형부터 입학사정관 제도가 도입됐다. 나는 교육을 받고 사정관이 됐다. 대입 수시전형이 주말마다 이어지는 2학기, 주중 나의 저녁시간은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 심사에 들어갔다. 몇백쪽에 달하는 서류 더미 속에서 질식할 것 같았다. 늘어난 업무량 때문만이 아니었다. 생기부의 내용만 봐서는 지원한 학생의 자격을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현장학습, 봉사활동, 학생회 활동 등의 실적이 영혼 없이 이어졌다. 기괴하고 공허했다. 차이를 알기 어려웠다. 생기부를 몇시간씩 읽다 보면 나의 정신세계가 붕괴될 것 같았다.

그 무렵, 인근 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전공탐방이라는 이름의 비교과 활동에 대한 협조 요청이었다. 방학이었지만 나름 의욕을 가지고 특강을 준비했다. 화려하고 강렬한 비주얼로 아이들의 흥미를 돋울 자신이 있었다. 30여명의 학생과 교사 3명이 왔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함께 온 선생님들은 펼침막을 걸고 이리저리 인증샷을 찍어대더니 서둘러 사라졌다. 앞자리 몇줄을 제외한 친구들은 강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엎드려 잤다. 내가 아는 소설가나 시인들도 유사한 경험을 토로했다. 기쁜 마음에 만남을 수락했는데, 자신의 책을 읽기는커녕 누군지도 모르는 친구들이 태반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작가와의 만남이라고 쓰인 펼침막이 내걸렸고 인증샷도 찍었다. 생기부의 한줄과 자소서의 글감이 탄생하는 현장이었다. 학력 지상주의 대한민국의 현실에선 그 어떤 제도도 제대로 발화하지 못하고 질식하는구나 싶었다. 심각한 철학적 질문과 고뇌 끝에 우리 전공은 입학사정관 전형을 폐지했다.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인사 검증이 딸의 입시 문제로 옮아가자 내심 기대했다. 이참에 형식적이고 내실 없는 입시 제도가 도마에 오를 수 있겠다, 교육계의 성찰과 변화의 불씨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탄핵으로 대통령을 바꾼 우리가 설마 이렇게 휘둘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2016년으로 시계를 돌려본다. 헌정 사상 초유의 정치 스캔들로 1년치 뉴스가 한나절에 쏟아졌다. 애초부터 그 정부에 대한 기대가 없었으니 놀랄 것도 없었다. 나와 비슷한 입장을 보였던 가난하고 바쁘고 공부 잘하던 조카의 가슴에 불을 지른 건 건 정유라의 입시부정이었다. 직권남용, 뇌물수수, 비선 실세 등의 단어에는 꿈쩍도 안 하던 조카가 알바를 포기하고 광장에서 겨울을 보냈다. 고등학생 두 아이의 엄마인 내 친구도 오십 평생 처음으로 집회 현장을 경험했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해당 대학 학생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역사가 한번 더 뒤집힌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주술에 넋이 나간 자유한국당 주광덕 의원은 인사검증 과정에서 딸의 생기부까지 공개했다. 사실 나는 한발 비켜서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전형을 거쳐 대학을 갔던 학생들, 당시 입시 지도를 했던 고등학교 선생님들, 생기부를 봤던 대학교수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제풀에 지쳐 그만두지 싶었다. 그런데 그들이 오히려 상실감과 차별, 특혜를 이야기한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명 결정은 대통령, 수사는 검찰이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빙의와 공감이 필요하다. 누군가 당신의 생기부를 공개했다면? 모골이 송연하지 않은가. 이를 가능하게 한 이들을 찾아내 절대 용서하지 말고 오래오래 기억하자.

김진우
건국대 디자인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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