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 올초 예술의 전당에 오른 연극 <레드>는 잊지 못할 경험을 안겼다. 추상표현주의 거장 마크 로스코와 가상의 조수 켄이 등장하는 이 극은 예술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특히 현대사회를 향한 로스코의 포효는 관객들의 마음을 쥐어짜 우리 안의 불순물을 꼼짝없이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레드’라는 번역어가 걸렸다. 통상 외래어는 기술적, 전문적, 개념적인 함축을, 고유어는 감각적, 정서적, 직관적인 함축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레드’를 패션·디자인계 등에서 쓰며, 얼굴이 ‘레드해졌다’ 하지 않고 ‘빨개졌다’ 한다. 그런데 극에서 레드라는 영단어는 후자의 영역을 지칭한다. 로스코와 켄의 레드는 F/W룩 색상이 아니라 “해돋이, 정열, 와인, 동맥피” 등 감각적, 정서적, 직관적인 것의 총체다. 즉, 이 극의 번역어는 ‘빨강’이어야 맞다. 빨강과 검정은 극의 핵심 모티프인데, 그 의미가 다뤄질 때마다 반투과적인 외래어가 몰입을 막아 크게 아쉬웠다. 이같이 외국 작품의 제목을 영어 발음대로 적어 번역하는 경우가 늘며 문제도 함께 늘고 있다. 영화계가 그 선봉에 있고, 출판계에서도 같은 방식이 유행이다. 사정은 있다. 영어는 세계 각국에서 모국어의 일부처럼 쓰인 지 오래며, 영어의 세련된 이미지는 흥행을 돕는다. 그러나 음차 번역이 표준이 된 것은 문제적이다. 먼저 무리한 음차는 제목이 제 기능을 잃게 한다. <소리 위 미스드 유> <오 머시!>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 온 파이어> 이런 난삽한 제목은 작품 표시와 소개라는 제목의 기본 임무조차 하지 못한다. 또한 영어 중심의 엉성한 음차 관행은 정체불명의 돌연변이를 양산하고 있다. <로마 위드 러브>는 영어 음차인데 ‘로마’는 한국식 표기다. 프랑스 영화를 <120 비츠 퍼 미닛>이라고 옮긴 경우는 반달리즘에 가깝다. 이처럼 최소한의 원칙이 결여된 영어 중심 번역은 문화적 대기를 흐리는 공해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번역을 게으르게 하면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의 폭이 줄어든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죄와 벌>,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잘된 번역은 우리 언어와 사고를 확장시킨다. ‘에트랑제’나 ‘스트레인저’가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번역이 있기에 우리는 이제 같은 한국어 단어를 볼 때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다. 나아가 번역 작업은 우리와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공히 깊게 해주며, 이런 과정은 귀중한 문화적 유산이 되어 돌아온다. 유럽에는 책 한권이 수세기에 걸쳐 재번역되며 사상적, 문학적, 역사적 양분이 된 경우가 허다하다. 일본 근대화에 번역이 큰 몫을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은 이런 유산이 적다. 번역가 이희재가 <번역의 탄생>에서 지적하듯 우리는 한동안 중역을 했고, 이후에도 의역 대신 경직된 직역을 고수해 한국어를 지키고 넓히는 데 모두 서툴러졌다. 그래서 음차 번역의 유행은 더 우려스럽다. 물론 음차가 적절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아무 고민 없이 음차를 택하는 습관은 작품 이해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표현력과 사유마저 감퇴시킨다. 까탈스러워 보여도 우리는 번역에 더 집착할 필요가 있다. 연극 <레드>는 올해로 5번째 제작됐다. 또 제작된다면 그때는 <빨강>을 보러 가고 싶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고 일어섰을 때, 객석의 빨간 의자를 보고 로스코의 포효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맛보고 싶다.
왜냐면 |
[왜냐면] 연극 ‘레드’가 아닌 ‘빨강’을 기대하며 / 김윤철 |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 올초 예술의 전당에 오른 연극 <레드>는 잊지 못할 경험을 안겼다. 추상표현주의 거장 마크 로스코와 가상의 조수 켄이 등장하는 이 극은 예술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특히 현대사회를 향한 로스코의 포효는 관객들의 마음을 쥐어짜 우리 안의 불순물을 꼼짝없이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레드’라는 번역어가 걸렸다. 통상 외래어는 기술적, 전문적, 개념적인 함축을, 고유어는 감각적, 정서적, 직관적인 함축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레드’를 패션·디자인계 등에서 쓰며, 얼굴이 ‘레드해졌다’ 하지 않고 ‘빨개졌다’ 한다. 그런데 극에서 레드라는 영단어는 후자의 영역을 지칭한다. 로스코와 켄의 레드는 F/W룩 색상이 아니라 “해돋이, 정열, 와인, 동맥피” 등 감각적, 정서적, 직관적인 것의 총체다. 즉, 이 극의 번역어는 ‘빨강’이어야 맞다. 빨강과 검정은 극의 핵심 모티프인데, 그 의미가 다뤄질 때마다 반투과적인 외래어가 몰입을 막아 크게 아쉬웠다. 이같이 외국 작품의 제목을 영어 발음대로 적어 번역하는 경우가 늘며 문제도 함께 늘고 있다. 영화계가 그 선봉에 있고, 출판계에서도 같은 방식이 유행이다. 사정은 있다. 영어는 세계 각국에서 모국어의 일부처럼 쓰인 지 오래며, 영어의 세련된 이미지는 흥행을 돕는다. 그러나 음차 번역이 표준이 된 것은 문제적이다. 먼저 무리한 음차는 제목이 제 기능을 잃게 한다. <소리 위 미스드 유> <오 머시!>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 온 파이어> 이런 난삽한 제목은 작품 표시와 소개라는 제목의 기본 임무조차 하지 못한다. 또한 영어 중심의 엉성한 음차 관행은 정체불명의 돌연변이를 양산하고 있다. <로마 위드 러브>는 영어 음차인데 ‘로마’는 한국식 표기다. 프랑스 영화를 <120 비츠 퍼 미닛>이라고 옮긴 경우는 반달리즘에 가깝다. 이처럼 최소한의 원칙이 결여된 영어 중심 번역은 문화적 대기를 흐리는 공해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번역을 게으르게 하면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의 폭이 줄어든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죄와 벌>,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잘된 번역은 우리 언어와 사고를 확장시킨다. ‘에트랑제’나 ‘스트레인저’가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번역이 있기에 우리는 이제 같은 한국어 단어를 볼 때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다. 나아가 번역 작업은 우리와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공히 깊게 해주며, 이런 과정은 귀중한 문화적 유산이 되어 돌아온다. 유럽에는 책 한권이 수세기에 걸쳐 재번역되며 사상적, 문학적, 역사적 양분이 된 경우가 허다하다. 일본 근대화에 번역이 큰 몫을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은 이런 유산이 적다. 번역가 이희재가 <번역의 탄생>에서 지적하듯 우리는 한동안 중역을 했고, 이후에도 의역 대신 경직된 직역을 고수해 한국어를 지키고 넓히는 데 모두 서툴러졌다. 그래서 음차 번역의 유행은 더 우려스럽다. 물론 음차가 적절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아무 고민 없이 음차를 택하는 습관은 작품 이해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표현력과 사유마저 감퇴시킨다. 까탈스러워 보여도 우리는 번역에 더 집착할 필요가 있다. 연극 <레드>는 올해로 5번째 제작됐다. 또 제작된다면 그때는 <빨강>을 보러 가고 싶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고 일어섰을 때, 객석의 빨간 의자를 보고 로스코의 포효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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