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박물관. 1967년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건축되었다. 매년 4월24일은 제노사이드 추모일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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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역자 2011년에 아르메니아의 제노사이드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르메니아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는 유서 깊은 나라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보았던 살풍경한 장면들―유리창 너머에 산처럼 쌓여 있는 신발, 가방, 머리카락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를 원하는 언어를 묻더니, 대답이 끝나자마자 안내자가 나왔다. 청순한 얼굴에 약간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선 홀은 캄캄했다. 맨 처음 눈에 띈 것은 플래카드처럼 걸려 있는 하얀 천 같은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어린 소녀들이 그려져 있었다. 뭉크의 그림처럼 무의식을 표현한 듯한 이 그림에서 소녀들은 떨고 있었고, 그 두려움과 공포가 보는 사람에게도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다음에는 제노사이드와 관련된 사진과 자료가 있었다.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는 제1차 대전 중 오스만 제국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일컫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물과 식량을 박탈당한 채 뜨거운 사막에 내던져졌고, 이때 사망한 아르메니아인은 약 150만명으로 추정된다. 박물관에는 제노사이드를 계획했던 오스만 정부의 관료 세 사람의 이름과 사진이 있었고, 처형된 아르메니아인 지식인과 정치인의 사진들, 그리고 사막에서의 행진과 죽음 등 제노사이드와 관련된 사건들이 차례로 전개되었다. 일련의 어두운 과정이 지나고, 맨 마지막에는 제노사이드로 인해 생겨난 아이들을 수용하는 고아원의 사진이었다. 커다란 벽면을 가득 채운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고, 이는 외부로 향한 통로와 연결되어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밖으로 나왔을 때, 제노사이드 희생자를 추모하는 꺼지지 않는 불 앞에 서 있게 되었다. 불 뒤에 있는 벽에는 세계 각국의 명사들이 아르메니아에 보내온 격려의 말들이 적혀 있었고, 안내자가 아나톨 프랑스의 시를 낭독하는 것으로 박물관 견학은 끝이 났다.(이상은 모두 기억을 되살려 쓴 것이다.) 제노사이드 박물관을 다시 생각하게 한 것은 공항에서였다.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상점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란 제목의 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다른 관광 상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제목의 책을 보면서,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알리기 위해서. 그렇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의 선조들이 당했던 불행한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 그러한 퍼포먼스를 기획한 것이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서 박물관에서 ‘체험’한 것을 ‘증언’하게 한 것이었다. 오래된 이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은 욱일기가 도쿄 올림픽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최근 언론보도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의 사고에서 욱일기는 나치의 깃발과 같은 선상에 놓인다. 생각해 보라. 2020년 7월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경기장에서 나치 깃발이 흔들리는 광경을. 현대 유럽에서 이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런데 도쿄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모르기 때문이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기간에 아시아에서 자행했던 일들을 미국과 유럽 등 국제사회가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사람들이 왜 일본 정부 인사들의 신사 참배에 분노하는지, 왜 한국 사람들이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우고 수요일마다 모여서 항의 시위를 하는지, 왜 욱일기를 올림픽 경기장에 들고 가는 것에 항의하는지, 그 이유를 국제사회는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늦은 것 같지만,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알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올림픽 경기에 욱일기가 등장했을 때 아시아인들이 느끼는 분노의 감정을 국제사회가 함께 느끼고 이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에 공감하고 협조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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