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호 ㅣ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지난 6월의 한반도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한 편의 영화 같았다. 4일 대북전단 살포 비난에 이어 16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 1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기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을, 23일 김정은 위원장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에서 전격 보류했다. 그리고 25일 문재인 대통령은 6·25전쟁 70주년 연설에서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을 함께 끝내자고 호소했다.
정부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대북전단이 촉발제였다. ‘존엄’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모독했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나서긴 그랬고 ‘아랫사람들’이 나섰다. 충격요법은 성공했지만 김 위원장은 더는 과유불급, 이제 그만하라 ‘점잖게’ 나왔다. 그럼에도 북한발 영화는 코로나19 사태가 아니었다면 좀 더 빨리 상영되었을 듯싶다. 김 위원장은 하노이 회담 이후 한국과 미국에 기대를 접고 새로운 길을 강조하였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미운 시누이 한국을 압박했다. 대선에 경황없는 트럼프로부터 진화타겁(趁火打劫·혼란을 틈타 이득을 취함)할 수 있다면 부수 효과다.
김 위원장의 ‘보류’는 잠시 냉각기를 갖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북한도 가용수단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시간과 고민이 필요하다. 보류한 행동계획들을 재집행할 명분 축적도 필요하다. 미 대선 이후 트럼프 2기든 바이든 신정부든 대북 입장이 나오고, 북한도 새로운 길이 분명해질 때까지 한국판 전략적 인내가 필요하다. 환경 변화의 추이를 냉정하게 예의주시하며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당장 수개월은 북한이 예민해하는 대북전단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이어 연말까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방역협력과 의료장비 등을 지원한다. 최근 집권당 지도부의 종전선언의 경우 상징적 의미는 있으나 주변국 참여 등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국회 차원이라면 오히려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의 재결의가 좋다. 새롭게 일을 추진하기보다는 기존 합의를 잘 이행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판문점선언에 전단 살포 중단 합의가 들어 있는 만큼 자연스럽게 북한의 불만을 해소하면서 정부의 남북관계 노력을 재강조할 수 있다. 혹 ‘기존의 전쟁을 끝낼 수 없다면(終戰)’ ‘앞으로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非戰)’ 선언을 추진해볼 만하다.
한편 한국은 북한에 심리적으로 위축될 필요가 없다. 한국은 가해자가 아니다. 북한에게 미안은 해도 잘못한 것은 없다. 북-미 간 진전 없음이 현 교착 상황의 원인이다. 욕해도 북한은 한국의 ‘오지랖’의 진정성을 잘 알고 있다. 단 우리의 정책 대응속도는 아쉬웠다. 존 볼턴 전 미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서 많은 한반도 ‘사건들’이 한국의 창의품이며, 한국의 플레이에 미국이 ‘걸려들었다’(hooked)고 했다. 한국이 일을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문 정부의 남은 임기 동안 독자적 남북협력 사업은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한-미 워킹그룹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폐지엔 득보다 실이 많으니 오히려 역활용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등 내실도 기해야 한다.
당장엔 김 위원장이 보류된 계획을 재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전략적 소통을 수시로 하는 중국을 활용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은 한국이 판문점선언 때 종전선언 관련 3자·4자 논란으로 중국을 배제하려 했다는 섭섭함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시진핑 주석의 방한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만 코로나가 안정적이더라도 불안정한 남북관계를 핑계로 미룰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시 주석의 방한은 한반도 안정의 가늠자이다. 어쩌면 중국을 움직이기 위해 한-중 간 ‘이익의 맞교환’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평화를 통해 남북 상생의 길을 찾아낼 것”이라 했는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프로세스란 ‘긴 길’로서 장기전을 요한다. 한반도 평화 운전석에 한국이 매번 앉지 않아도 된다. 지금처럼 모두의 피로감이 극심할 때 잠시 휴게소에서 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직 1년 반 이상이 남아 있고 운전석에 앉을 기회는 여전히 많다. 유리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것도 가장 슬픈 전쟁을 끝내기 위한 역사적 진전이다. 잠시 ‘보류’된 냉각기 동안 남북 간, 국내적, 국제적 접점을 반드시 찾아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