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훈 ㅣ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원
소동파는 과거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슈퍼스타였다. 그러나 지금은 작년의 트렌드조차 기억하기 힘든 시대. 현대의 우리가 왜 먼 과거 중국 송나라 시인의 손글씨를 눈여겨보아야 할까. 동파의 진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황주한식시권>(黃州寒食詩卷,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이다(도판 1). 잔뜩 웅크렸으며 한쪽으로 삐딱한 글자 모양과 개성 넘치다 못해 일견 졸렬해 보이기까지 한 필획. 그 어두운 기운이 예술가의 침울한 내면에 대한 공명을 부른다. 저 유명한 <적벽부>의 표표한 자유인의 이미지와 겹쳐 더욱 오묘한 기분이 든다. 형언키 힘든, 그러나 혹은 그래서,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예술적 감동이요 지적 자극이다.
소동파의 진적은 매우 드물다. 그렇기에 최근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이 ‘파두완벽’전을 통해 공개한 소동파의 <백수산 불적사 유기>(白水山佛迹寺遊記, 이하 ‘백수산기’)가 동양 문화에 관심 깊은 이들의 비상한 주목을 끌고 있다. (도판 2, 2020년 9월18일~2021년 5월30일 온라인 카카오갤러리 동시 진행. 소동파 진적은 최초 5일만 공개하고 이후는 복제품 전시) 박물관 측의 설명에 의하면 고려 말 원(元) 간섭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줄곧 비장되어 오던 것이라 한다. 사실이라면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던 새로운 소동파 진적의 등장이며 동아시아 문화계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위와 같은 전래 경위의 설명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해야겠다. <백수산기> 곳곳에는 위소(危素, 1303~1372), 팽시(彭時, 1416~1475), 화운(華雲, 1488~1560) 등 명나라 사람들의 도장이 다수 보인다. 원나라 때 고려에 들어온 글씨라면 이런 도장들이 찍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는 전승 과정 고증의 잘못일 뿐 작품 자체가 진품이라면 큰 문제가 못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서예 작품으로서 <백수산기>의 문제는, 획이 매우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워 변화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필획에 살지고 마름(비수·肥瘦)의 변화가 없으며, 끝에서 힘을 빼는 기제도 천편일률적이다. 먹 색의 변화도 눈에 띄지 않는다. 즉 <백수산기>에는 글쓴이가 직접 썼을 경우 응당 나타나야 할 먹의 농담 및 운필의 조절이 보이지 않는다. 대개 이는 베껴 쓴 글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동파의 진적을 앞에 놓고 옮겼을 가능성도 적다. 소동파의 다른 글씨들과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소동파의 글씨는 오른쪽 위가 올라간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자체(字體, 글자 모양)와 조밀한 포치(布置, 글자의 배치)가 특징이다. 그런데 <백수산기>는 세로로 긴 자체가 대세이며, 포치 또한 성글다. <백수산기>의 글씨는 필획, 포치, 묵색에서 모두 작위적 인상이 강하다.
가장 결정적 문제는 소동파의 본작품 뒤에 후대 사람들이 쓴 감상문, 즉 발문(跋文)이다. <백수산기>에는 조맹부의 아들 조옹(趙雍)과 화가로 유명한 황공망이 썼다는 발문이 있다. 그러나 이 두 발문은 실제로는 황정견의 글이다. 황정견은 소동파 문하 출신이며 그 자신 또한 북송 시대 시와 글씨의 대가이다. 조옹의 발문은 황정견의 <산곡집>(山谷集) 제29권(사고전서 본) 첫머리에 ‘동파의 글씨 뒤에 씀’(題東坡字後)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리고 황공망의 발문은 같은 권 ‘동파의 글씨에 대한 발’(跋東坡書) 일부와 ‘동파가 쓴 원경루부 뒤에 붙인 발’(跋東坡書遠景樓賦後)의 문장을 교묘하게 합친 것이다. 게다가 황공망의 발문은 현전하는 그의 다른 글씨들과 비교해 보면 도저히 그가 쓴 것이라 보기 힘들다. 이 두 발문은 누군가 황정견의 글을 적당히 절취하여 쓴 뒤, 유명 서화가인 두 사람을 가탁한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백수산기>는 명말청초의 어느 시점에 누군가 소동파의 서풍을 흉내 내어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소동파의 서예 진적은 문화사적 위상과 감상의 가치가 거대하고 무겁다. 따라서 그 진위를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문제제기를 계기로 향후 깊은 논의가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