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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가락시장의 ‘직거래 도매상제’ 도입 왜 외면하나 / 윤석인

등록 2020-11-09 19:08수정 2020-11-10 02:36

윤석인 ㅣ 희망제작소 부이사장

서울 가락시장 등 농수산물 공영도매시장의 거래제도 다양화, 즉 ‘직거래 도매상’(시장도매인) 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거세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농해수위)의 윤재갑·위성곤 의원, 정무위원회의 민형배 의원 등이 제도 개선 요구를 계속하더니 박주민 의원도 기자회견을 열어 가세했다. 급기야 가락시장을 개설·관리해온 서울특별시농수산식품공사의 사장과 노조위원장, 가락시장관리운영위원장 등 4인의 핵심 인사가 공동 서명한 ‘호소문’을 150쪽의 상세 연구보고서와 함께 최근 정·관계 고위공직자들에게 전달하였다. 다른 지역의 공영도매시장들도 같은 요구를 잇달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국감을 앞두고 한 경제신문과 <한국방송> 광주지사의 기획보도 말고는 주요 중앙언론사들이 대부분 침묵하고 있다. 기사 가치가 크지 않다고 판단하는 걸까? 가락시장 유통인 일부의 의심대로 직거래 도매상 제도를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소수 도매시장법인)의 로비에 넘어간 걸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을 수도 있다. 우선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 등이 정의한 도매시장법인과 시장도매인이란 용어부터 낯설고 구분이 잘 안 된다. 독과점 경매법인, 직거래 도매상으로 표현하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왜 이리 비슷하고 모호한 용어를 만들었는지 답답하다.

경매가 공정하고 투명한 시스템일 거라는 ‘상식’(?)도 걸림돌일 수 있다. 영화에서 본 미술품 경매시장처럼 사람들은 가락시장의 농산물 경매도 그렇게 진행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밤중에, 시장 상인들이 아니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암호 같은 단어들을 경매사들이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대부분 단 1~2초 만에, 출하자 의사와는 무관하게 낙찰가격이 정해지는 기막힌 현장을 본 사람은 드물 테니까. 그래서 같은 날 같은 출하자가 가져온 같은 품목의 농산품 낙찰가격이 최고 12배까지 차이가 나는 현실을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울 테니까(지난 8월9일 최아무개씨가 출하한 동일 품질의 10㎏ 청양고추가 ㄱ법인에선 2만4천원, ㄴ법인에선 2천원에 낙찰됐다). 여러 사정으로 저녁 경매시간에 맞추지 못한 출하자들이 헐값에 ‘떨이판매’를 하며 눈물을 훔치는 장면을 본 적은 더욱 없을 테니까.

직거래 도매상에 대한 합리적(?) 의심도 있을 수 있다. 투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농산물 가격을 후려치고 대금 지급을 미루거나 찔끔찔끔 나누어주는 등 생산자들을 골탕 먹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 말이다. 하지만 요즘 직거래 농산물 가격은 품질과 당일의 수급 상황에 따라 출하 단계에서 이미 결정돼 온라인에 실시간 공개될 만큼 시스템이 발전했다. 대금은 정산조합을 통해 판매 즉시 결제된다. 2004년부터 서울 강서도매시장에 시범 도입한 직거래 도매상 운영 실태를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이들이 갑질하며 농간을 부릴 여지는 99.9% 사라졌다.

강서도매시장의 실험은 더 많은 사실을 보여준다. 독과점 경매법인이 차지한 시장 사용면적은 직거래 도매상들의 1.5배인데, 최근 몇 년간 총거래액은 직거래 도매상들이 1.8배 많다. 단위면적으로 보면, 직거래 도매상이 2.7배 높은 거래 실적을 올린 것이다. 생산·출하자들의 신뢰가 직거래 도매상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인 셈이다.

하나 더. 다른 지역의 공영도매시장도 사정이 비슷할 테지만, 가락시장 내 5개 경매법인 가운데 지배주주가 농산물 유통 전문인(법인)인 데는 이제 없다. 경위는 조금씩 다르지만, ‘배타적인 법정 경매권 하나로 황금알을 낳는’ 이들 경매법인의 지배주주는 이제 건축회사나 사모펀드 등이다. 그런데도 농림축산식품부는 의연히 경매법인만을 절대 지지하고, 청와대는 침묵한다.

서울특별시농수산식품공사 임직원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농산물 유통 환경이 크게 바뀌었고 강서도매시장의 실험이 성공적이었으니 직거래 도매상 제도를 가락시장에도 도입하자는 것. 경매제에도 긍정적 측면이 있으니 경매법인과 직거래 도매상이 서로 경쟁하며 함께 발전하는 체제로 개선하자는 것이다.

가락시장에서 거래되는 농산물 연간 총액은 4조2천억원에 이른다. 기후위기 등으로 해마다 고생하는 우리 230만 농민들에게 다만 얼마라도 안정된 수입을 보장해주는 것이 우리 소비자 시민들이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의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이제라도 주요 언론사와 농식품부, 청와대는 직거래 도매상 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가락시장 운영 주체들의 절절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촛불정부에 남은 시간이 이제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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