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런 버로 ㅣ 국제노총(ITUC) 사무총장
2017년 5월 청와대를 방문하여 갓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노동이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겠다 외쳤던 문 대통령은 그 경로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87호, 98호 비준 계획을 제시했다. 이로써 한국 노사관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는 희망을 담아 문 대통령과의 면담을 세계 각국 노총 대표자가 모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보고했다. 그 뒤로 2년 반이 지났다. 오늘까지 협약 비준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우려스럽게도 노동기본권 보장 수준을 후퇴시키는 법안이 협약 비준의 선결과제로서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2억 국제노총 조합원을 대표해서 박병석 국회의장 앞으로 긴급하게 정부 노조법 개정안 철회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협약 비준을 먼저 하고 그 뒤에 국제노동기구의 기술지원을 받아 국제기준에 부합하도록 법 개정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국제노총이 ‘글로벌 노동권리 지수’를 처음 발표한 2014년 이래로 한국은 줄곧 5등급 “노동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로 분류되었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한국이 왜 이런 오명을 갖게 되었을까. 바로 헌법적 권리 행사를 촉진하기는커녕 거꾸로 권리 행사를 억압하는 규정이 수두룩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때문이다. “노조법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헌법 제33조와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으로 규율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조법의 문제가 심각하다.” 2016년 한국의 국제노동기구 가입 25주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20주년을 기념하는 토론회에서 현 대법관인 김선수 당시 변호사가 내린 진단이다. 토론회에는 국제노총과 경제협력개발기구 노동조합자문위원회, 국제노동기구 국제노동기준 전문가도 참석했다. 이 진단은 그동안 국제노동기구 결사의 자유 위원회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제소사건 심의에서 반복적으로 내린 판단과 권고에 비춰 보더라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특수고용노동자·자영업자를 법 적용에서 배제하는 노조법 2조1호,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한 경우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는다는 2조4호 라목이 결사의 자유 원칙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임원의 자격 요건을 제한한 23조, 설립신고 과정에서 조직의 구성, 규약 등을 행정당국이 심사할 여지를 두고 있는 12조 역시 마찬가지다.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를 법으로 규율하는 24조는 노사자율 원칙의 명백한 침해라고 지적했다.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 표현과 단체행동을 전면 금지하고, 정부의 노동 정책이나 정리해고와 같은 이슈에 대해서는 파업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쟁의행위 목적 제한, 파업권이 제한되는 ‘필수 유지 업무’의 폭넓은 규정, 파업에 무분별하게 적용되는 업무방해죄와 손배가압류 등 단체행동권 침해 역시 결사의 자유 위원회가 빈번하게 지적한 사항이다.
국제노총이 살펴본 바로는 정부 개정안은 ‘노조 할 권리 제한법’이라고 불릴 법한 현행 노조법을 개선하기보다는 인권·노동권 실현에 후퇴를 가져올 법안이다. 협약 비준을 반대하는 사용자단체의 과장된 목소리를 담은 결과라고 한다. 사용자단체들의 입장은 놀랍지 않다. 국제노총은 한국 재벌이 세계화로부터 이익을 향유하면서도 인권과 노동권에 관한 의무를 회피해왔음을 잘 알고 있다. 2017년 국제노총은 삼성의 악명 높은 무노조 정책에 맞서 ‘기업의 탐욕을 멈춰라’ 글로벌 캠페인을 개시했다. 법원이 노조 와해를 주도한 삼성 임원들을 처벌하는 진전을 이루기도 했다. 그런데 정부가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의 선결조건으로 노동기본권을 후퇴시키는 법 개악을 시도한다는 점이 놀랍다.
코로나19 대유행과 디지털 기술로 노동 세계에 전례 없는 위기가 닥쳤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국제노총은 정부, 노동조합, 기업이 함께 ‘보편적 노동권 보장’을 기초로 경제의 회복력을 재구축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을 것을 촉구했다. 바로 지금이 기회다. 한국 정부와 국회는 권리 존중, 최저생활임금 보장, 단체교섭권 보장, 보편적 사회보장제도, 기업의 권리 침해 예방 의무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 사회 회복의 모범을 만들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