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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도 고려해야 / 김백주

등록 2020-12-02 18:02수정 2020-12-03 02:08

강제징용 판결 갈등 어떻게

김백주ㅣ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상임연구원

‘합의하지 않을 것에 대한 합의’, 이것이 외교 현장에서 실용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유지라는 외교술이다. 교섭 양측이 합의할 수 없는 문제를 미해결인 상태로 보류하는 것이다. 당장은 대립을 피할 수 있고 합의 가능한 이익은 서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실용적일 수 있다. 하지만 보류를 선택했을 당시의 조건이 변하면 그 문제는 현안으로 재등장한다. 그 부담은 시대와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가중된다. 보류의 선택이 역사가 되고 그 역사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때로 현상유지는 최악의 선택이 된다.

강제징용 판결 문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가 내각이 들어서면서 한국 정부와 민주당에서는 ‘보류’론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스가 내각이 아베 전 정권과는 다를 것이라는 판단에서 일본의 ‘양보’를 기대하는 것인지, 압류자산 매각절차를 최대한 미루고 우선 한-일 관계 개선을 꾀하겠다는 것인지 당정의 목소리가 제각각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정부와 여당 모두 강제징용 판결 문제에 대한 마땅한 해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안을 정책 선택지에 넣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가 내각 또한 한국의 대법원 판결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문제를 역사인식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국제법적인 문제로 인식한다. 일본의 역대 정부가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고, 모든 연합국에 적용된 절대적인 전후처리 원칙에 반한다고 본다. 일본 정부가 그 어떤 타협안도 거부한다면 남은 선택지는 피고 기업의 압류자산 매각 절차를 밟는 것밖에는 없다. 물론 일본 정부가 공언한 상응 조치를 감수할 수 있다면 과감하게 시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코로나 위기 속에서 한일 모두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라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렇다고 압류자산 매각을 언제까지고 늦출 수도 없다. 일본의 결단을 기대할 수 없는 한 이 문제를 덮고 급한 대로 한-일 관계를 개선한다는 발상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역으로 우리 정부가 먼저 제기하면 어떨까? 이 선택은 결코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다. 강제징용 판결 문제는 영토주권과 직결된 독도 문제와는 다르다. 역사적 사실관계를 다투거나 역사인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법적 논리를 판단하는 문제이다.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 한국 대법원의 판결 논리가 국제법적으로 타당한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 판단을 국제사법재판소에 맡기자는 것이다. 승패가 갈리는 ‘싸움’이 아니다. 한국 정부에게는 제소할 충분한 명분과 논리가 있기 때문에 패소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물론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피해자 측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현금화 조치 실행과 동시에 해야 한다. 사전에 일본 측에도 통보해야 한다. 일본도 거부하지 않을뿐더러 상응 조치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승소할 가능성은 어떤가? 첫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툴 최대 쟁점은 민사소송 대상인 ‘위자료’ 청구가 한일청구권협정의 해당 조항에 포함되는가의 여부이다. 일본 국회에서의 대정부 질의응답 과정에서조차 일본 정부는 위자료 청구 ‘소송’ 자체가 한일청구권협정에 위배된다는 명징한 법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둘째, 국제사법재판소의 최근 판결 경향이 인권 및 피해자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한다. 충분히 승소를 기대해볼 만하다.

물론 패소할 수도 있다. 다만 소송 과정에서 새로운 해법 또는 ‘화해’를 모색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1)민사소송 당사자 간 화해가 성립될 수도 있으며 2)일본 측이 위자료 청구가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대신 추가 소송이 있을 경우에 한국 정부가 위자료를 부담한다는 타협안도 있을 수 있다. 설령 패소하더라도 정치적인 부담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라는 선택은 결국 아시아 각국에 대한 전후처리 과정에서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았던 일본, 그러한 일본의 전후처리를 용인하고 심지어 종용했던 미국, 실제 ‘피해자’를 외면했던 한국의 책임 등 당시 ‘보류’를 선택한 세 정부의 부작위와 책임 전가에 대해서 그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스가 정부를 설득할 길이 없다면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안을 정책 선택지에 넣어야 한다. 그리하여 역사는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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