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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코로나 재확산, 다시 공동체를 생각한다 / 정안숙

등록 2020-12-07 17:48수정 2020-12-08 02:40

정안숙 ㅣ 공동체심리학자

한국임상심리학회가 코로나와 심리학이라는 주제로 이달 4일 특별논문집을 발간하였다. 공동체심리학자로서 나는 코로나 이후에 보고 싶은 우리 공동체의 모습에 관해 썼다. 코로나를 겪어오면서 우리 공동체가 보여준 모습을 국내 일간지 기사들에서 찾아 거울삼고자 했다. 국내 코로나 확진자가 등장한 2020년 1월20일부터 논문을 작성하기 직전의 2020년 8월8일까지 기사들을 분석하였다. 그 기사들에서 아직 자료화로 걸러지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커뮤니티라는 영어 단어를 애초 번역해 사용하던 당시에는 주로 “지역사회”라고 했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분명히 지역적 공동체를 의미할 때 우리는 지역사회라고 했다. “지역사회 감염” “지역사회 확산” 등과 같이 장소적인 의미의 테두리가 느껴지는 표현들이다. 커뮤니티의 더 본질적 용법인 관계적 공동체의 의미로 “공동체”라는 표현을 썼을 때는 주로 “공동체 연대” “공동체 의식” “운명·지구·교육·국민 공동체”처럼 공동의 노력으로 어떤 결실을 이루어보자는 표현들에서다. 2020년 2월6일 즈음에는 “취약계층”이라는 표현이 “코로나”와 함께 등장했다. 노인들, 아이들, 환자들이 전염병에 취약하다는 것에서부터, 기저질환을 비롯한 현재의 건강 상태가 취약성을 증가시킨다는 기사들이었다. 이후에는 밀집·밀폐·밀접 환경이나 음식을 나눠 먹는 우리의 식문화 등도 취약성으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심리학적인 의미의 취약성은 매우 복잡다단하다. 얼핏 유사해 보이는 외상성 사건을 경험할지라도, 누군가는 끝 모르는 좌절감으로 세상을 등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럼 좌절하는 사람은 취약한 개인인 것인가? 유전적으로나 성격 특질적으로 개인이 취약할 수도 있다. 사교성과 대인관계 기술도 이에 한몫한다. 하지만 스트레스 사건이나 사회환경적 여건이 쌓이고 쌓이면, 그 앞에선 장사 없다. 지난 수십년간의 연구들로 충분히 검증되었다. 2020년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의 20대 여자 자살률이 통계 수치를 매달 경신하고 있다면, 이게 취약한 20대 여자 개인들의 문제인가?

코로나 상황에서 취약성은 다양한 사회환경적 차원으로 우리 삶을 파고들었다. 인종적으로, 젠더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장애 때문에, 종교적으로, 그리고 이들의 무수한 교집합으로. 기사들에서 보이듯이, 이주노동자들은 코로나 상황에서 감염에 더 취약해졌고 노동의 조건은 더 열악해졌다. 성소수자들은 쉽게 혐오와 낙인의 대상이 되었다. 비대면 수업에서 장애 학생들은 학습권을 더 많이 박탈당했고,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는 학생들은 온라인 수업이 불가능했다. 잇따른 파산, 해고, 실직, 노동 중 참사,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좌절의 연쇄에 누가 희망의 답을 제시한 적이 있는가?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공동체 의식’은 소속감, 문제의 해결, 그를 위한 상호작용, 그리고 정서적 연대를 경험해야 생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함께 해결해봄으로써 끈끈해지는 그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비닐하우스에서 공동숙식하며 우리 먹거리를 생산해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언제까지 남의 나라 사람들인가. 성소수자는 언제까지 몹쓸 젊은이들인가. 경제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가정의 아이들은 언제까지 남의 자식인가. 요양병원에 거주하게 된 어르신들은 언제까지 남의 집 부모인가. 태극기 집회에 참가한 이들은 언제까지 남의 교회 광신도들인가.

우리가 공동의 집단 효능감을 경험할 창구가 필요하다. 쌓이고 쌓이는 이 좌절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해법은 그것뿐이다. 신천지 변곡점에서 그랬고, 이태원 클럽 변곡점에서 그랬고, 광화문집회 변곡점에서 그랬다. ‘어려운 상대’인 코로나 앞에 보건당국 종사자들, 일선 의료진, 그리고 우리 모든 시민이 덜 좌절하도록. 삶에 대한 포기를 유예할 만큼의 작은 힘을 내도록.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이 들도록. 조금만 더 희망을 찾자. 조금만 더 우리가 이루어온 것들을 믿자. 조금만 더, 나와 당신, 우리가 함께하는 공동체를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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