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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중이온가속기의 과거, 현재, 미래 / 이상진

등록 2021-02-10 17:37수정 2021-02-11 02:11

이상진ㅣ중이온가속기 연구위원·한국노총 기초과학연구원노조 위원장

기초과학은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과학기술의 뿌리다. 일본은 기초과학 진흥을 도모하고 이를 산업과학에 활용하고자 1917년에 이화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러한 기초과학 육성은 20년이 지나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일본을 전투기와 전함뿐만 아니라 항공모함까지 자체적으로 설계 제작할 수 있는 세계적인 강국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기초과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원자폭탄으로 결국 패망한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연합국은 일본 패망 몇 개월 전 일본 기초과학의 상징인 이화학연구소를 폭격했다. 일본 패망 후에도 이화학연구소에 있는 사이클로트론 가속기 2대를 파괴하고 이화학연구소를 해산시킨다. 연합국은 가속기를 활용한 기초과학연구가 주는 국가적 경쟁력과 파급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보다 100년가량 늦은 2012년에 기초과학연구원을 설립하고 단군 이래 최대 기초과학사업인 중이온가속기 건설 구축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근 10여년간 중이온가속기 건설 구축 사업은 정부 관료들의 업무 파악을 위한 장으로 변질되었다. 새로운 관료가 부임할 때마다 연구자들은 가속기와 실험장치의 연구개발보다는 정부부처가 요구하는 다양한 형식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새해가 되면 부족한 성과에 대한 사유와 만회 대책 수립을 위한 보고서 작성의 계절이 다시 시작되고, 사업 조직과 방향에 대한 정부부처의 비공식적인 의사가 사업단에게 전달되면서 점검을 위한 티에프(TF)가 구성된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기초과학의 산실, 1조5천억원의 중이온가속기 사업은 수년간 정부부처와 각종 위원회 위원들의, 말하자면 장난감이 되었고, 누적되어온 사업 지연의 책임은 오롯이 사업단에게 전가되었다.

정부부처와 위원회 위원들에게 시달린 중이온가속기 건설 구축 사업단의 전 단장들은 수년간 사업 조직과 인사를 거의 분기별로 개편하고 권한과 책임이 모호한 여러 하부 조직과 하부 직책을 수없이 만들고 폐기하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연구자들은 연구개발보다 사내 정치에 치중하게 되었고, 사업단은 권위적이고 폐쇄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사업단은 중이온가속기 구축이 아닌 사내 정치에 성공한 보직자들 간의 자리 유지를 위한 안정적인 이해관계 구축을 위해 존재하게 됐다. 사내 정치에 성공한 보직자들 중심으로 구성된 조직은 실무자가 수년간 보고한 사안을 현 단장에게는 오히려 반대로 보고하기도 하고, 단장이 지시하지 않은 사안을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단장의 지시로 둔갑시켜 실무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결국 단장의 눈과 귀를 막고, 실무자들에게는 단장의 권위를 이용해 복종을 강요하고 단장과의 접촉을 막아 사업을 사유화한 셈이다.

몇몇 보직자들은 정부부처나 각종 위원회의 눈치를 살피며,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말로 정부부처와 사업단 간의 신뢰를 저해했다. 실무자들은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기보다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과 그들이 만든 거짓된 목표를 떠받치는 유령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누적된 거짓말에 대한 결과는, 의사 결정에서 배제되고 정보가 차단된 실무자들에게 정부부처나 위원회에 해명할 보고서 작성 업무로 돌아온다. 이렇게 중이온가속기 구축은 스스로 자멸할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중이온가속기 구축 사업에 아직 희망은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업이 지연되면서 10여년 가까이 쌓인 기술적 노하우와 경험 그리고 자신감이 그것이다. 아직 남은 기술적 문제는 연구개발을 하지 못해 발생한 문제일 뿐 연구개발을 하게 해주면 해결될 수 있다. 연구개발이란 그런 것이고, 기초과학이란 그런 것이다.

중이온가속기 구축 사업단이 스스로 곪은 부분을 도려내고 주체적인 조직으로 변화하고, 정부부처와 각종 위원회가 불필요한 사공의 역할을 버린다면, 연구자들은 연구개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중이온가속기는 대한민국을 기초과학이라는 반석 위에 올려놓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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