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한 ㅣ 40대 회사원·서울시 성북구
넨(가명). 50대 초반의 필리핀 여성으로 한국에 온 지는 10년이 넘었다. 고국 필리핀에 4명의 자녀가 있고, 그들의 생활비와 양육비는 온전히 넨의 몫이었다. 넨은 서울 강북권의 다세대주택에서 방 하나를 임차해 혼자 살았다. 밤에는 경기 북부권에 있는 양말 공장에서 일하고 낮에 집에서 자는 생활을 여러 해 동안 해왔다. 설 명절을 며칠 앞둔 지난 2월 어느 날, 낮에 집에서 자고 있던 넨은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문을 열라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잠결이었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문을 열어주었다.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말에 유효기간이 만료된 여권을 내밀었고, 그게 몇년간 정들었던 집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목동의 출입국관리소라며 전화를 걸어온 넨은 한참을 울었다. 정확히 어떤 경위로 여자 혼자 잠을 자고 있던 집에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들이닥쳐 불법적인 신분검사 후 연행(?)해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넨과 넨의 집주인에게 들은 말을 종합해서, 넨의 옆방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들은 합법적인 신분이라 그날 연행되지 않았다)들에게서 한 며칠 밤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고, 인근 누군가가 질병관리청 혹은 출입국관리소에 신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해볼 따름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최근 큰 이슈가 됐고 방역당국은 특정 지역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전수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시는 불법체류자도 신변상 불이익을 받지 않고 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홍보해 선제검사를 독려 중이다. 정부에서도 체류자격 미비 여부와 상관없이 코로나19 검진과 치료를 받게 하고 있고 공공의료기관은 미등록 이주 외국인이 방문할 경우 법무부에 통보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1월28일부터 이를 한시적으로 면제 중이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법무부, 고용노동부 등 정부가 좀더 적극적인 홍보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정부나 지자체가 발표하는 코로나19 확산 정보 대부분은 한국어이며 그나마 지원하는 외국어도 영어와 중국어 정도에 그치고 있다. 캄보디아·네팔·베트남·스리랑카처럼 영어나 중국어가 낯선 언어권 출신의 외국인들은 정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설령 정보를 이해해서 자가격리를 하고자 해도 이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생계 곤란과 신분 노출로 인한 불이익 우려 등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방역지침을 따르기엔 어려움이 많은 게 현실이다.
내·외국인 구분 없이 선별검사에 누구나 손쉽게 불안감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자가격리나 확진 판정 시 더 적극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한시적으로라도 불법체류자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건 어떨까? 최소한 불법체류자 단속이라도 기간을 정해 한시적으로 실시하지 않는 건 어떨까? 앞서 소개한 ‘넨’의 외국인 친구들은 그날 이후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고국의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있겠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 중인 것으로 보인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신분이 다르지만 우리 주변의 외국인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거창하게 ‘보편타당한 인류애’까지는 아니더라도 단순히 지역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여자 혼자 자고 있는 집에 남자 여럿이 들이닥쳐 최소한의 생필품을 챙길 여유도 주지 않고 잡아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하기 어렵다. 결국 넨은 설 명절을 포함해서 2주 정도 화성 출입국관리소에 수용(?)돼 있다가 필리핀으로 떠났다. 10년 넘게 살아온 한국에 모든 짐과 친구들과 추억들을 남겨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