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왜냐면

[왜냐면] 왕이 되려 하는가 / 엄치용

등록 2021-04-05 18:57수정 2021-04-06 02:36

엄치용 ㅣ 미국 코넬대 연구원

서울 종로구청 앞에는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집터라고 적힌 표석이 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정도전 없이 조선이 세워질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정도전 없는 이성계는 고려 우왕을 섬기는 동북면 병마사일 뿐이다. 장자방, 한신, 그리고 소하. 세 사람의 전략가 없이 유방의 한나라는 중국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유방을 고용한 것이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속으로는 “내가 이성계를 앞세워 조선을 건국했노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란 실제로는 참모 또는 책사가 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 듯하다.

동북면 병마사 이성계가 본 고려는 이미 국가가 아니었다. 홍건적과 왜구가 시시때때로 백성을 괴롭히고, 위정자들은 무능하였으며, 일부 귀족만 호사로운 생활을 할 뿐, 소작농으로 전락한 백성 대다수는 빚에 허덕이는 궁핍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머리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새 왕조를 만들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북방 함주까지 찾아온 정도전을 만나고, 자신보다 일곱살 어린 그를 책사로 맞이한 것이 조선의 문을 연 신의 한 수였다.

한국 정치의 근현대사를 돌이켜보자. 박정희-김종필, 전두환-장세동, 노태우-박철언, 김대중-박지원, 김영삼-김덕룡·김현철, 노무현-문재인·이해찬, 이명박-이상득·박희태, 박근혜-김기춘·서청원. 공식 참모만 봐도 그 시대의 정치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참모는 대통령의 얼굴을 만들고, 시대를 만든다. 참모의 전략에 따라 국가와 국민의 안위가 결정된다.

7일 서울과 부산 시장 보궐선거가 있다. 왕이 되고픈 사람들은 많으나, 그들의 선거공약은 현재 우리가 힘들어하는 문제들, 즉 소득 감소, 일자리 불안, 부동산 문제, 교육 등 산재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 주변에 정도전 같은 전략가가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재탕, 삼탕 인사를 거듭하니 새로움, 즉 혁신의 방안이 나올 리 없다.

정도전은 사서삼경의 하나인 <맹자>를 읽으며 혁명을 꿈꾸었다고 말한다. 그 구절을 읽어보자.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 해서 들판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된다.” 체제를 바꾸려면 군주의 눈이 아닌, 백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내년 3월9일에는 대통령선거가 있다. 헌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 파괴를 운운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윤석열로 인해 여야의 셈법이 한층 복잡해졌다. 조선 건국 이전의 이성계는 고려를 홍건적과 왜구로부터 지켜낸 명장이요, 애국지사였다. 일부 여론조사에서 보이는 지지율 1위의 윤석열이나 다른 후보자들이 역성혁명 이전의 이성계와 버금가는지는 세심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그러나 누구든 왕이 되려는 자, 가장 낮은 백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라. 그리고 주변에 정도전 같은 참신한 전략가를 두라.

맹자는 양혜왕에게 몽둥이와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차이가 있는지를 물었다. 다를 바 없다고 대답하는 양혜왕에게 맹자는 칼로 살인하는 것과 올바른 정치를 못 해 백성을 죽이는 것이 차이가 없음을 일깨워준다. 정치를 하려는 자, 누구든 이 말의 무서운 뜻을 새기시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