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ㅣ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전봉준 없는 동학농민혁명운동을 생각할 수 없듯이, 장재성 없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 선생이 아직도 정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나는 4월27일 진실화해위원회를 찾아가 장재성의 신원을 위한 재심 요청서를 제출하였다. 재심 요청의 사안은 네 가지이다. 장재성은 일제강점 아래서 7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이런 애국 투사를 아직 국가보훈처는 유공자로 예우하지 않는다. 이게 상식에 맞는가?
1949년 대한민국에서 장재성은 홀연 사라졌다. 부인 박옥희 여사는 남편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죽은 남편이 다시 나타났다. 1949년 12월 광주지법 재판정에서였다.
부인은 통곡하였다. “여보. 살아 계셨구려.” 살아 돌아온 남편을 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근디 이게 머시다요?” 망가져버린 남편의 몰골을 보고 비탄의 눈물을 흘렸다. 영장 없이 체포하고 잡아다가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은 예사이고, 통닭구이까지 하는 것이 취조의 세리머니였다. 간첩으로 붙들려 적색 오징어포로 둔갑하기까지 장재성이 얼마나 당했을지 눈에 선하다. 그래서 “장재성에 대한 불법 취조 과정에 대해 사실을 밝혀줄 것”을 나는 요청하였다.
일본 총독부로부터 7년형을 선고받았던 장재성, 그는 다시 대한민국 법무부로부터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래도 일본 총독부는 장재성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한민국 법무부는 장재성을 죽였다.
1950년 7월5일 수감 중이던 장재성을 끌어내 처형하였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에게 대한민국이 준 것은 훈장이 아니라 총살이었다. 수감 중인 장재성을 총살한 것은 국가폭력의 전형적 사례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진실화해위원회를 찾았다.
네 번째 건은 좀 복잡하다. 1949년 12월16일 광주지방법원이 장재성에게 7년의 징역형을 선고한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간첩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장발장에 대해 생각하였다. 빵 한 조각 훔쳤다고 5년형을 선고한 것은 지나친 것 아닌가. 빵 한 조각 훔친 것도 절도일까. 어른들은 왜 이런 법을 만들었을까. 광주지방법원이 유죄의 근거로 제기한 장재성의 행적은 모두 1948년 11월 중순 이전의 것들이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은 1948년 12월1일이었다. 그러니까 법 제정 이전의 행위로 거슬러 올라가 법을 적용한 것이다. 중학교 때 배웠던 ‘소급입법 금지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었다.
장발장이나 장재성은 모두 법 없이 살 인물이었다. 법률이 그들을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 한 조각의 빵 때문에 장발장이 죄인이 된 것은 법률적으로는 불가피하였다고 치자. 장재성은 달랐다. 법률적으로 지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법무부는 법률을 소급 적용하여 7년형을 선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진실화해위원회에 물었다.
살다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를 당한다. 광주의 3·1운동을 이끈 김범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이기홍, 정해두에게 국가보훈처는 서훈을 거부하고 있다. 그 사유를 물었더니 “친일 흠결” 때문에 심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국가보훈처의 공직자들께서 독재체제에서 성립한 판단기준에 대해 재고해주길 바란다. 이제는 적폐를 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