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왜냐면

[왜냐면] 조연의 매력 / 김진우

등록 2021-05-03 18:19수정 2021-05-04 02:38

김진우 ㅣ 건국대 디자인대학 교수·<앉지 마세요 앉으세요> 저자

통섭이 트렌드이던 시절, 내가 몸담고 있던 학회에서 작곡 전문가를 모셔 세미나를 열었다. 연사가 무대 위에서 직접 피아노를 치다 멈추다를 반복하는 흥미로운 강연을 이어가던 중, 갑자기 객석의 맨 앞줄이 어수선해졌다. 양복을 입은 어른들이 죄다 일어나 누군가를 맞이했다. 그 누군가가 첫 줄 가운데 자리에 가 앉는 몇초 동안, 그분에게 인사를 하려는 둘째 셋째 줄의 사람들이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몇초 동안, 무대 위 강연자는 어색하게 말을 멈췄다.

맨 뒤에 앉아 있던 나는 무대 위아래의 장면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분들을 이제 와서 비난할 생각은 없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필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초대한 자리라, 놀란 강연자가 이 에피소드를 사석에서 술안주 삼을 것 같아 민망했을 뿐이다.

의자와 자리는 권력을 상징한다. 의자만으로도 의자 주인의 지위를 거의 알 수 있다. 문제는 집, 직장 등 일상 공간의 권력 구도를 다른 장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려는 심리 때문에 생긴다. 일상에서 자신을 권력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곳을 벗어나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공공 영역에서는 자신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고, 거기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다. 늦게 온 마당이라도 기필코 중간에 들어와 원래 정해진 자리에 앉아야 하고, 무대 위에는 지금 그 순간 다른 주인공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잠시 뒷자리에 앉아 있거나, 기다렸다가 쉬는 시간에 들어와 앉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술안주 삼아 놀렸을, 그날의 전문가 분야 사람들도 실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가 초래한 긍정적인 현상 하나는 자리의 권력이 다소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5인 이상 집합 금지 덕분에 최대 4명이 모여 앉는 식사와 커피 자리는 훨씬 탈권위적이다. 온라인상에서 화면은 발제자의 화면만을 돌아가며 키워준다. 이러한 변화를 미처 인식하지 못하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로 시작하는 황당한 언어와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일상의 권력이라도 공적 장소로 나오면 해체돼야 마땅하다. 늘, 언제나, 나만, 주인공일 필요도 없다. 잘 모르지만 그거 좀 피곤한 일 아닐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연상을 따로 주는 것도 그런 의미 아닐까. 이참에 배우 윤여정의 수상 소식 자체보다 조연의 매력을 성찰해보는 게 좋겠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