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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기후비상 시대, 초등학교 학습준비물실서 경험한 일

등록 2021-05-17 17:39수정 2021-05-18 02:08

[왜냐면]  윤성환 ㅣ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과정 휴학생

지난 두달간 초등학교 학습준비물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습준비물실은 말 그대로 수업에 필요한 각종 준비물들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문구점을 방불케 하는 이곳엔 온갖 학용품, 학습 도구들이 망라되어 있다. 여기서 하는 일은 크게 두가지다. 학생들이 매 수업시간 필요한 준비물을 찾으러 오면 대여해주는 일, 시시때때로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배부하기 위해 만들어낸 각종 유인물을 인쇄, 복사, 제본, 코팅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새삼 절감한 점은, 우리 교육이 엄청난 자원 낭비 위에 서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로선 한번 보고 말 유인물 또는 교실 장식용으로 A4·B4용지, 각종 색지와 같은 엄청난 종이가 소모되고 있었다. 시시때때로 수십, 수백장의 A4용지에 출력 또는 복사해 나가는 유인물들―한번은 816쪽을 인쇄해본 적도 있다―, 한번에 학년 전 학급용으로 170장씩 소모되기도 하는 도화지 등…. 다들 별생각 없이 종이를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기실 종이의 대량 사용은 대량 벌목을 동반할 수밖에 없고 또 종이를 감싸고 있는 건 비닐인 만큼, 비닐의 대량 소비 역시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다. 두달간 근무하면서 유인물을 이면지로 복사, 인쇄해달라는 요청은 단 한번도 없었다.

물론 이런 식의 자원 소비가 비단 이곳 학교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전문직, 사무직 일터가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의 자원은 유한할진대, 자원을 아끼는 방법을 가르치기는커녕 엄청난 자원 낭비를 무심결에 저지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도록 하는 이런 세태는, 교육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을 타락시키는 행위가 아닐까. 통계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 한해 인쇄용지로 소비하는 종이량은 2019년 기준 145만1127톤이며, 천연펄프로 종이 1톤을 만드는 데 나무 24그루가 소모된다는 점(<그린포스트코리아> 보도)을 감안하면 2019년 한해만도 국내 인쇄용지 소비에 총 3482만7048그루의 나무가 희생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금의 아동들은 성년이 된 대부분의 시기를 이미 가속화된 ‘기후비상 시대’ 속에서 보내야 한다. ‘기후비상 시대’는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로 이어지는 종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시대다. 새로운 세대에게 기후비상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주어도 모자랄 판국에 우리 교육은 여전히 종전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아이들에게 당장 가르쳐야 할 것은 지구의 자원을 어떻게 아껴 쓰고 절약할 수 있는지, 지구의 뭇 생명들과 어떻게 공존하며 기후비상 시대에 적응해나갈 수 있을지 등의 문제가 아닐까. 한번 쓰고 내다 버릴 유인물에 인쇄된 각종 교과 활동 내용보다 이게 더 절박한 테마가 아닐까. 학습 유인물은 A4용지가 아닌 재생용지로 배부해도 충분할 것이고, 무엇보다 그 사용량을 줄여야 할 것이다.

사실 많은 학생, 청년들이 졸업 후 느끼는 점이지만, 지금 우리 교육 현장의 교과 내용은 실제 살아가는 데나 학문적으로나 별 도움이 되는 내용은 거의 없다. 초등학교는 좀 다르긴 하지만, 대개 관념적 암기와 시험 변별력 위주의 수단적 ‘학습’일 뿐이다. 그런 교육에 엄청난 자원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는 건, 곧 종이로 쓰이기 위해 벌목될 운명에 처해 있는 나무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일상이 달라져야 하는 시대다. 인류의 미래와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뭇 생명의 미래를 상호 연결해 사고하는 게 습관이 될 수 있어야 하는 시대다. 종이 한장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원이 소모되었고, 그것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의식할 수 있어야 하는 시대다. 교육은 그 속성상 이런 시대적 요구의 선두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교육은 미래에도 여전히 ‘실패한 교육’으로 남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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