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김소연 ㅣ 샤넬노조 위원장
명품과 페미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샤넬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한번씩 언급된다. 1900년대 유럽에서 여성의 코르셋이 만연할 때 탈코르셋에 앞장선 디자이너가 바로 샤넬의 설립자 코코 샤넬이다. 샤넬도 이런 기업의 이력을 홍보마케팅에 활용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입사하기 전부터 샤넬에선 여성을 존중하고 평등할 것만 같았다.
샤넬 직원 대부분은 여성이다. 신입 시절부터 코코 샤넬의 일대기와 창립 정신을 배운다.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커진다. 덩달아 여성이 존중받는 회사 생활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성폭력 사건을 겪으며 기업의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었음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한명의 피해 직원을 만났을 때 문제가 이렇게 커질지 몰랐다. 사건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비슷한 피해자가 나왔다. 사태가 예사롭지 않았고, 노동조합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여러명의 피해자가 비슷한 수법의 성추행을 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건은 무려 10년 전부터 진행 중이었다.
피해를 자세히 밝히지 못하는 직원, 힘들어하다가 일을 그만둔 직원도 있었다. 한 피해 직원은 “노동조합 위원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하려다 끝내 말하지 못하고 퇴사를 했다”고 전해왔다.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서 힘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과 함께…. 억장이 무너졌다. 알 수 없는 죄책감도 밀려왔다.
곧바로 노동조합은 피해 사실을 정리해서 회사에 알렸다. 당시만 해도 회사가 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해줄 것이라는 데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회사의 대응은 의외였다. 사건을 국내 최대 로펌에 의뢰했고 변호사들이 진상조사를 하겠다며 피해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마치 가해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불안감을 호소하며 힘들어했다.
노동조합은 샤넬 글로벌에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똑같은 답변을 들어야 했다. 샤넬의 엄격한 글로벌 정책과 행동강령으로 피해자가 구제될 거라는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피해자중심주의를 모르는 것인가? 성추행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인가? 회사의 조치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경찰에 고소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때부터다.
고소장을 제출하자 회사는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샤넬은 피해자 보호보다 임원의 권리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가해자는 여전히 회사에서 당당히 일하고, ‘혹시나 회사에서 마주칠까?’ 하는 피해자의 공포는 계속되고 있다. 회사의 조치는 매우 실망스럽다.
최근 경찰은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고, 우리는 이제 대한민국 검찰을 믿고 기다리고 있다. 고소장이 제출된 지 5개월, 사건을 회사에 알린 지 8개월이 흘렀다. 너무 힘들게 멀리 돌아서 여기까지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성폭력 상담센터를 찾아가고 고소장을 낼 것을 왜 회사에 알렸을까? 후회한다.
지난 8개월, 우리가 얻은 교훈은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피해 입증을 위해 영상·음성·문자 등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것, 하다못해 일기장에라도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것, 성폭력 사건은 회사가 아니라 성폭력 상담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교훈은 샤넬의 기업 이미지는 페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샤넬은 제품을 홍보하지 않는다. 기업의 이미지와 가치를 홍보한다. 창립자의 유산을 이어 사회에 모범이 되겠다고 한다. 오늘도 샤넬은 직원들에게 창조 중심 브랜드, 인간중심주의 기업, 약속을 지키는 명품 브랜드의 선도기업이라는 기업 가치를 교육한다. 세가지 원칙을 반복적으로 듣는 직원들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인간중심주의도, 약속을 지키는 기업도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의 이미지 훼손과 기업 가치 하락을 바라는 노동자는 없다. 자부심을 느끼며 일하고 싶다. 그래서 더더욱 다짐한다. 이번 사건이 기업 샤넬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을 바로 세우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