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 이름을 다 모를 뿐 저마다 이름이 있단다. 단지 작물 재배에 유용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름을 불리기도 전에 제거당하는 거지. 누구는 풀 뽑는 일로 무심을 익힌다고 하던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풀을 베는 일이 무심을 익히기에는 아득한 이야기 같아.
[엄마아들 귀농서신] 조금숙 괴산서 농사짓는 엄마
밭에 들어서니 벌의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다. 어딘가 집을 지으려고 모이는 모양이야. 스웨덴에는 꿀벌용 미니호텔을 만들어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살충제 사용과 기후위기로 개체수가 감소한 꿀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만 머리로 아는 것과는 관계없이 벌 쏘인 경험이 각인되어 날갯짓 소리도 예사로이 들리지 않고 뭉텅 겁이 난단다.
낫을 들고 풀베기를 하려고 앉으니 투둑투둑 소리가 들렸다. 요즘 하도 비가 잦아 빗방울이 떨어지나 고개를 들었어. 하늘은 말갛게 밝아오고 있었다. 빗방울 소리가 아니라 풀벌레들이 튀는 소리였단다. 풀벌레들과 함께하는 농사지만 익숙해지지 않는구나. 옆에 밭 주인은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야. 지난겨울에 무릎 수술을 하시고는 밭에 약을 못 치신다. 약통 짊어지는 일이 버거우시대. 밭에 철퍼덕 앉으셔서 풀을 베곤 하셨지. 얼마 전에 서울 사는 아들을 불러 감자를 캐셨어. 한낮은 뜨겁다고 새벽부터 서둘러 감자를 캐셨단다. 그리고 저녁 무렵 밭에 가는 길에 할머니를 만났는데 할머니 입술이 퉁퉁 부어 있었어. 뭐가 물었는지도 모르시겠대. 이렇게 몸이 고된 것도 고된 거지만, 농사에 적응하기 위한 통과의례가 만만치 않다는 것도 알아둬야 한다.
풀벌레들 툭툭 튀는 소리에도 민감할 만큼 벌레에게 물려 곤욕을 치른 것이 한두번이 아니야. 농사를 시작한 첫해, 목 주변에 붉은 발진이 도드라진 걸 보고 동네 형님이 풀독이라며 걱정을 했다. 첫해여서 그러려니 했던 풀독에 10년차가 되는 올해도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고라니 피해 없이 농사지을 수 있는 작물이 들깨라고 하더구나. 해서 지난해 시범적 밭농사로 들깨를 선택했다. 모종을 잘 키워 밭에 정식하는 날이었단다. 한낮은 뜨거우니 새벽부터 모종 심기를 시작했다. 해뜨기 직전이어서 깔따구들이 무지하게 달려들었다. 깔따구가 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따끔거리던 얼굴이 저녁 무렵이 되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울퉁불퉁 부어올랐다. 눈두덩에서부터 볼따구까지 울긋불긋 볼썽사나웠다. 특히 아로니아 수확할 때면 쐐기벌레도 수도 없이 잡아낸다. 수확에만 집중하다가 만나는 쐐기벌레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단다. 이토록 벌레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살충제를 쓰지 않는 이 뚝심이 문득 기특하지만, 바보 같다고 생각할 때도 많단다.
여름은 풀과의 전쟁이라고도 말한다. 돌아서면 부쩍 자라 있는 풀을 베고, 또 베어내야 하는 작업이 반복되기 때문이야. 요즘같이 비가 자주 오면 키우는 작물보다 풀이 훨씬 잘 자란다. 예초기로 풀베기를 하지만 고랑이 좁은 곳은 예초기를 돌리기에도 적절하지 않지. 하는 수 없이 낫으로 해야 한다. 지난번에 네가 ‘이름 없는 풀들’이라고 했다만, 우리가 그 이름을 다 모를 뿐 저마다 이름이 있단다. 단지 작물 재배에 유용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름을 불리기도 전에 제거당하는 거지. 누구는 풀 뽑는 일로 무심을 익힌다고 하던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풀을 베는 일이 무심을 익히기에는 아득한 이야기 같아.
‘농업은 생명’이라고 말은 참 쉽게 한다. 풀독으로 여전히 시달리는 오늘도 생각한다. 유기농은 참 힘들지만 흙을 살리는 일이고 결국은 생명을 살리는 일, 이라고 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딱히 설명하고 싶지 않구나. 할머니께선 풀약 치면 안 되냐고 묻는다. 그렇지만 아들, 유기농은 풀이랑 벌레로 가득한 농사란다. 모기만 물려도 진물 날 때까지 벅벅 긁는 아들이 할 수 있을까.
장마 소식과 함께 며칠 전 종일 비가 내렸다. 바람도 제법 거칠어서 힘들게 키운 옥수수 농사를 망칠까 불안불안했어. 아니나 다를까, 옥수수가 군데군데 쓰러져 있더구나. 처음 봤을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 그나마 많이 쓰러지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밭에 옥수수는 쓰러진 거 하나 없이 멀쩡한 거야. 왜 그런지 궁금해서 동네 할머니께 전화를 했다. 할머니는 한달음에 땀을 흘리시며 올라오셨다. 옥수수가 쓰러졌다는 소리에 놀라셨던 모양이야. 여기저기 돌아보시고 내린 진단은, 우리 밭은 풀이 많아 옥수수가 웃자란 거라고 하시더구나. 그러고 보니 다른 밭은 고랑에 풀이 하나도 없었던 게 생각났어. 할머니는 풀하고 같이 키우는 옥수수 농사가 영 마땅치 않으신 거 같아. 내년에 심을 때는 너무 달게(간격을 가깝게) 심지 말라고 처방을 주고 가셨다. 다음주면 옥수수 수확할 시기가 된다. 일조량이 모자라지나 않을는지 조마조마했지만 강렬한 햇볕 덕에 잘 익어가고 있다. 며칠 전에도 요란한 빗방울 소리에 잠을 설쳤다.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애를 태워 가며, 동네 할머니한테 순치기 안 해주냐고 꾸중 들어 가면서 열심히 키운 옥수수 농사는 풍작이야. 너의 호언장담을 은근히 기대하는 얄팍한 마음에 혼자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