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1991~2021 _13

1994년 7월8일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의 죽음을 계기로 남과 북에서 폭발한 ‘근친증오’는, 27년이 흐른 지금도 남과 북의 화해·협력·공동번영의 노력을 뿌리부터 뒤흔들지 모를 ‘휴화산’이다. 1994년 7월12일치 <노동신문> 1면 갈무리
1994년 7월9일 정오 북의 공식 발표로 외부에 알려진 김일성의 죽음은 세계를 서로 다른 색깔의 충격과 혼란에 빠뜨렸다. 김영삼의 첫 대응은 ‘전군 비상경계령’이었다. 온 나라가 충격과 슬픔에 빠진 북을 향해, ‘우리는 기습 남침을 우려하고 있어’라고 답한 셈이다.‘김일성 사망’ 공표 이틀 뒤인 1994년 7월11일 김용순 (조선노동당 중앙위 대남 담당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은 이홍구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한테 보내온 전화통지문을 통해 “중대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측의 유고로 예정된 북남최고위급회담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위임에 의해 통지하는 바입니다”라고 알렸다. ‘위임’의 주체는 북이 “김일성 동지의 서거”를 알리며 “오늘 우리 혁명의 진두에는 주체혁명 위업의 위대한 계승자이신 김정일 동지께서 서 계신다”고 선언한 대로 ‘김정일’이었다. 북이 정상회담 ‘취소’가 아닌 ‘연기’를 통보해온 사실을 두고, 당시 남쪽 언론은 “북 정상회담에 ‘상당한 미련’”(<동아일보>) 등으로 해석했다. 이영덕 국무총리는 그날 국회에 나와 “남북이 이미 합의한 정상회담 원칙은 유효하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날 오후 야당인 민주당의 이부영 의원이 임시국회 외무통일위 회의에서 정부에 ‘조문단 파견 용의’를 물은 뒤로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치달았다. 이부영은 북의 정상회담 연기 통보를 “김정일 체제가 되더라도 정상회담을 계속하겠다는 화해의 신호”로 읽고, “4가지 전제조건”을 달아 “정부 차원의 조문 검토 필요성”을 언급했다. “북과 대화해야 한다면, 김정일 체제 안정이 대화·협상에 필요하다는 인식을 정부가 갖고 있다면, 정상회담이 계속 추진돼야 한다면, 우리 국민의 양해가 성립한다면” 조문하는 게 어떻겠냐는 매우 조심스러운 제안이었다. 문제는 그다음. “수백만명을 죽인 전범은 조문해야 하고,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라는 게 말이 되느냐. 김일성은 실정법상 반국가단체의 수괴다.” 집권당인 민주자유당 박범진 대변인의 이 논평은 행정부와 국회의 조문단 파견 여부 논의를 비틀어 ‘사상 검증의 단두대’에 세웠다. 김영삼은 ‘김일성의 죽음’을 아쉬워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사라지자 김영삼은 태도를 180도 바꿨다. ‘김일성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폭발한 “냉전 반공주의의 광기”(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에 편승하며 이를 한껏 부추겼다. 꺼져가는 장작불에 기름을 끼얹듯. 매사를 국내 정치적 이해득실과 ‘여론 지지도 추이’라는 잣대로 판단하는 김영삼 특유의 ‘냉탕-온탕 오가기’다. 1994년 7월13일 저녁, 미국 영주권자인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이 평양에 가서 조문을 했다는 <조선중앙방송> 보도가 나왔다. 이튿날 “남조선의 각당 각파 인사들과 각계각층 인민들이 평양에 조문단을 파견하려는 데 대해 사의를 표하며 따뜻한 동포애로 정중히 맞이할 것”이라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담화가 발표됐다. 애초 북은 ‘국가장의위원회 공보’로 “외국의 조의대표단은 받지 않기로 한다”고 발표한 터. 이런 까닭에 남쪽 조문단을 환영한다는 조평통 담화는 ‘남남갈등’을 부추기려 한 게 아니냐는 문제 제기를 피하기 어려웠다. 당연(?!)하게도 당시 통일부는 ‘조문 목적 방북 불허’ 방침을 재확인했고, 공보처는 세계일보사에 ‘박보희를 해임하라’고 압박했다. 1994년 7월18일 국무회의에서 이영덕 국무총리가 ‘김일성 사망’ 이후 처음으로 ‘김일성은 전범’이라는 취지의 정부 공식 견해를 밝혔다. “김일성은 민족분단의 고착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비롯한 불행한 사건들의 책임자”라 “조전 발송, 조문단 파견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무분별한 행동”이므로 “실정법을 위반하는 어떠한 행위도 법에 따라 엄단하겠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김영삼 대통령 주최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박홍 서강대 총장은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공산당(조선노동당)에 입당해 국내 대학가와 노동계, 외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200~300명쯤 된다”고 말했다. ‘주사파’라는 멸칭으로 불린 ‘민족해방파’(NL)와 <노동의 새벽>의 시인 박노해로 유명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당시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사실상 적대적 경쟁 관계였을 뿐더러 사노맹의 대북관은 보수세력과 전혀 다른 이유로 매우 ‘반북적’이어서, 박홍의 ‘사노맹 뒤에 사로청, 그 뒤에 김정일’은 찰진 운율을 빼면 완벽한 모순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무차별 폭력과 낡아빠진 공산주의를 맹종하는 학생들에게까지 언제나 관용으로 대해줄 수 없다”고 박홍의 ‘고발’에 ‘화답’했다. 이틀 뒤 김영삼 정부의 외무부는 1950년 4월10일 김일성이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을 찾아가 전면 남침 방침을 ‘승인’받은 사실이 담긴, 러시아 정부가 제공한 ‘한국전쟁 문서’를 공개해 ‘김일성 전범론’에 기름을 끼얹었다. 러시아 정부는 김영삼 정부의 일방적 문서 공개에 당혹하며 격하게 항의했다. 김일성의 죽음을 “우리 당과 혁명의 최대의 손실이며 온 민족의 가장 큰 슬픔”이라 규정한 북이 이런 소동에 침묵할 리가 없다. 북은 ‘조평통 성명’과 ‘조평통 서기국 보도’라는 공식 문서에서조차 “인간이기를 그만둔 김영삼 일당”과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다”며 “오직 징벌을 가하는 것으로써만 결산될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반민족범죄”라고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첫 남북정상회담 코앞에서 돌발한 ‘김일성의 죽음’은, 남과 북의 ‘근친증오’를 폭발시켰다. 샴쌍둥이처럼 분리 불가능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 한번 일이 틀어지면 ‘죽이고 싶을 만큼’ 더 미워지는….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김영삼 정부 시기는 “남북관계의 공백기”로 역사에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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