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ㅣ작가·시셰퍼드 활동가
위드 코로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들으면 웃을 일이다. “난 수천년 전부터 너희들과 살아왔고 전세계 방방곡곡에 퍼진 지 2년이 넘는데, 새삼스럽게 그걸 선언한다고?” 코로나와 함께한다는 계획을 거칠게 표현하자면 바이러스의 박멸·통제를 포기하고 적응해 살기로 한 것이요, 병으로 치자면 완치는 불가능하니 병의 관리·적응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그동안 온 국민이 방역에 최선을 다했기에 불가피한 수순이라는 공감대가 지배적이다.
이 방향 전환을 다른 위기, 기후 변화에 적용해보자. 기후 위기 대응은 크게 저감-적응-무대응의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저감은 기후 변화 자체(온도 상승)를 최대한 막는 것이고, 적응은 기후 변화를 불가피한 상수로 놓고 피해 최소화에 집중한다. 우린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주류 정책입안자(정부·양당)들은 입으론 저감을 말하지만 사실상 ‘적응’에 해당하는 정책을 펴거나 무대응 중이다. 탄소중립이 그 대표 격으로, ‘저감’처럼 보이지만 뜯어보면 산업계가 새로운 환경에서도 경쟁력을 잃지 않고 적응하도록 돕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비주류 입안자들(정의당)은 기후 변화의 피해가 클 취약계층 배려에 초점을 맞춘다. 이 또한 적응에 해당한다. 시민사회 역시 정의로운 전환을 추구하다 보니 유사한 목소리가 커졌다. 즉, 정신 차려보니 본격 저감 정책은 누더기가 되거나 실종되고, 적응 정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코로나로 치면 2년간 전쟁처럼 치른 방역을 건너뛰고 곧장 “위드 기후 변화”로 갈아탄 격이다. 선언도 소리 소문도 없이. 재난 영화에 비유하자면 지구에 운석이 접근하는 상황에서, 충돌을 막는 데 총력을 기울여 보기도 전에 피해 경감 대책에 돌입하는 시나리오다.
‘최전선’에 있는 전문가·활동가들도 적응을 말하고 있다. 사정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럴 수도 있고, 한심한 각국 정부를 보면 이해도 간다. 하지만 ‘기후 변화는 막는 게 아니라 함께 겪는 것’ 유의 적응론이 우세해지면 (정의로운 의도로 말했더라도) ‘리스크 관리’ 모드로 들어가면서 최약자 정도는 고려하되 사회의 큰 틀은 유지하는, 자본 엘리트에게 유리한 보수적 접근이 힘을 받는다. “기후 변화 말고 체제 변화”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막지 못할 거라면 뭣 하러 체제까지 바꾼단 말인가? 결국은 저감과 적응을 병행하더라도 향후 십년은 적응론을 피해야 한다. 당장은 숫자 놀음이 아닌 최대치의 비타협적 저감을 위해, 체제 전환 수준의 변화에 목을 매야 한다. 즉, 탈성장의 추구, 고탄소 비필수 산업의 폐지같이 지금은 과격해 보여도 실제 저감을 위해 필요한 일들에 매달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 사태로부터 배울 게 있다. 장기화된 방역으로 누적된 피로와 불만이 기후 대응에 독이 될 공산도 크지만,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아주 잠시나마) 자본주의의 ‘스톱 버튼’을 누르고 경제 부문을 공공 통제 아래 둔 놀라운 경험, 그로 얻은 사회적 상상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안드레아스 말름 같은 사상가가 제안한 ‘전시체제에 준하는 생태적 레닌주의’와 같은 급진적 대안들을 적극 검토하자.
나는 적응이 두렵다. 어느덧 마스크에 익숙해져 여차하면 수년을 더 쓰라고 해도 받아들일 태세의 그런 뛰어난 적응력. 절실하게 누리고 싶은 공기도, 절박하게 지키고 싶은 것도 없이 더위는 에어컨으로, 미세먼지는 공기청정기로, 식량부족은 라면으로, 불편한 진실은 가짜 뉴스로 때우며 행동에 필요한 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는 적응력…. 그렇다, “인간이 무엇에나 적응하는 동물”(도스토옙스키)이란 사실 자체가 문제다. 그게 정녕 인간이라면 그걸 극복하려는 탈인간들이 필요하다. 그나마 적응‘이라도’ 할 만한 지구는, 적응 안 하려고 발악을 해야 가능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