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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증세 논쟁, 이념 뒤에 숨지 마라

등록 2006-02-14 18:05

홍경준 성균관대 교수˙사회복지학
홍경준 성균관대 교수˙사회복지학
세상읽기
정치적 해결이 필요한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선택을 할까. 우선 저마다 가진 이념적 지향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에 제기되는 증세냐 감세냐의 문제, 혹은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에 대한 논란은 이념 갈등이 또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선 어느 누구도 자신있게 증세와 큰 정부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이념적 지향은 대체로 정부에 대한 불신과 시장에 대한 신뢰 쪽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또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국민 대다수는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즉, 정부의 책임 방기를 탓하면서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증세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모순적 행태를 보이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 이념적 지향에 충성을 다하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삶의 과정에서 획득한 이해관계와 규범에 따라 선호와 선택이 달라지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물론 이러한 행태는 서로간의 상호작용과 학습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변화의 방향이 모순의 축소 쪽을 향하도록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어야 하는데, 의식의 성숙이란 바로 그러한 힘의 작동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중요한 사회적 쟁점들을 주로 이념에 따른 것으로 치부하고 처리해 왔다. 그 과정에서 쟁점들의 구체성과 실질적 의미는 사라지고, 그 차이는 실제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정치 지도자들과 정책 결정자들, 그리고 그 주변의 지식인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안 하면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도리어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내외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사람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말이다.

증세냐, 감세냐에 대한 합리적 선택의 방향은 그 전제가 되는 복지국가 제도에 의해 크게 달라진다. 따라서 조세저항운동의 상징인 ‘프로포지션 13’에 찬성하는 캘리포니아주 중산층의 선택도, 증세 노선의 사민당에게 투표하는 스웨덴 중산층의 행동도 모두 합리적인 것이다. 이념적 지향의 상당부분은 국민성이나 계급의식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복지국가 제도 그 자체가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증세에 대한 국민의 동의는 그것의 선택이 자신들 삶의 필요조건이라는 확신이나 그럴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증세 제안은 즉흥적인 애드립도, 뚝딱 만들어서 선거에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도 아니다. 그것은 제도의 형성과 정착에 드는 비교적 긴 시간을 지탱할 수 있는 비전과 전략, 그리고 구체적인 실행능력을 요구한다. 정책을 주도할 정부 여당이 꼭 해야 할 일이지만, 결코 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가 하면 증세를 반대하기 위해 야당과 그 주변의 지식인들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왔다. 그들이 동원한 용어는 선정적이며 활용한 담론은 무책임하다. 감정에 호소하며, 문제를 단순화하고, 사실의 일면만을 반영하는 주장을 진리로 포장한다. 가령, 시장의 확대가 정부 개입을 요구하는 문제들을 자동적으로 줄여주는가. 유럽 복지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정치적 설득과 학문적 논의,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이 다르다면 그 다름은 방법에 있을 뿐이지 사실의 재단에 있지는 않다. 언젠가는 정부를 이끌고 정책을 주도할 거라면, 이런 식으로 일하는 습관은 그들을 위해서도 또 국민을 위해서도 당장 버려야 한다.

홍경준/성균관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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