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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허경영 지지가 말해주는 것

등록 2021-12-13 17:53수정 2021-12-14 10:22

[세상읽기] 한승훈

종교학자·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이번 대선에도 어김없이 출현한 허경영을 바라보는 시선은 의외로 다양하다. 많은 이들에게 그는 특유의 기이한 언행과 노래, ‘공중부양’으로 유명한 일종의 예능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의 양자라거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밀보좌역이었다거나,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취임 만찬에 한국 대표로 초청받았다거나, 박근혜 전 대통령과 결혼을 약속했다는 등의 허위 사실을 유포하다 처벌받은 범죄자이기도 하다. 또 그는 1987년 대선 이래 거의 모든 주요 선거에 도전해온 정치인이다. 지난 8월, 그는 전근대풍의 장군 복장을 하고, 칼을 차고, 백마를 탄 채 행주산성에 등장해 20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최근 <에스비에스>(SBS)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로 널리 알려지게 된 그의 또 다른 일면은 종교 지도자로서의 면모다. 피선거권이 박탈되어 있었던 10년 사이에 그는 강연을 통해 수많은 지지자를 모았고 2016년부터는 신인을 칭하며 경기도 양주에 ‘하늘궁’이라는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 단체는 2019년에 ‘초종교하늘궁’이라는 법인이 되었고, 이어서 2021년에는 ‘하늘궁 유지재단’이라는 종교법인도 설립되었다. 그의 교의에 의하면 하늘궁은 ‘백궁’이라는 우주적 공간과 지상을 연결하는 경계이며, 허경영 자신은 모든 인류를 정화하고 세계를 통일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메시아적 존재다. 이 단체의 멤버십은 알기 쉽게도 기부 금액에 따라 서열화된다. 백궁으로 가는 티켓을 얻는 데에는 300만원이 필요하며, 건축헌금 3천만원을 내면 가까이서 강연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배정되고, 1억원을 내면 ‘대천사’가 될 수 있다.

분명 그는 개인적인 명성과 카리스마를 이용해 이례적으로 단기간에 성공을 이루고 있는 신종교 지도자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지향은 일반적인 한국 근현대 신종교의 전형적인 문법에서 어느 정도 일탈해 있다. 오히려 그에게서는 조선 후기 비밀결사 지도자들과의 유사성을 상당 부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종종 강력한 정치적 욕망을 노출했고, 그 때문에 역모 혐의로 지목받곤 했다. 17세기 초, 정묘호란 이후의 혼란 속에서 유민, 화적, 전직 군인, 추노꾼, 도망 노비 등을 포섭해 무장집단을 이룬 이충경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강원도 깊은 산속 거점에 세명의 장군신을 모신 신당을 차리고 제를 지내며 자신이 장차 정권을 장악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추종자들에게 영의정, 병조판서, 이조참판 등 나중에 차지할 관직을 미리 부여하는 방식으로 결속을 강화하였다. 허경영 또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대통령대리’니, ‘암행어사’와 같은 직책을 약속하였다. 이충경 집단이 만든 일종의 정책집인 20개 항목의 <개국대전>은 허경영의 33가지 혁명공약만큼이나 구체적이고도 비현실적이었다.

18세기 말에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추종자를 모으며 모반을 계획한 조직이 있었다. 그들의 종교적 지도자인 문양해는 자신이 여러 신적 존재와 접촉할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 미래의 정치 상황을 환히 내다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의 정치권력에서 밀려난 양반들을 포함한 지지자들은 재물을 갖다 바치고, 큰 건물을 짓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왕조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퍼트리거나 군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허경영은 강연에서 <송하비결>, <격암유록> 등 예언서를 풀이하며 자신이 ‘만국의 성인’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양해 등이 <정감록>이나 <진정비결> 같은 당시의 예언서를 이용한 방식과 대단히 닮았다.

유사한 종교현상은 유사한 조건에서 출현한다. 정치 참여의 길이 막혀 있거나 제도정치에서 아무런 효능감을 느끼지 못할 때 종교 지도자에게 현실 변혁의 욕망을 투영하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일어날 수 있다. 허경영은 대의정치와 온라인 미디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전근대적 정치-종교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따라서 기성 정당들에 투표하는 것보다 허경영의 영성 상품과 축복을 구매하는 것에서 더 큰 기대와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딘가 고장 나 있는 것은 허경영을 숭배하는 이들보다는 한국의 대의정치 쪽일 가능성이 높다. ‘혹세무민하는 사기꾼’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만큼도 신뢰를 얻지 못하는 정치는 대체 어찌하면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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