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서한나 | 보슈(BOSHU) 공동대표·<사랑의 은어> 저자
겨울이면 수능시험을 그럭저럭 치르고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내던 게 생각난다. 초장과 기름장을 나르고 물걸레질하며 12월을 공짜 시간으로 여겼다. 대전의 십대가 시내에서 보자, 하고 나타나는 곳은 대전역 근처 은행동. 은행동에는 나이키도 있고 지하상가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다. 은행동에 있는 신당동 떡볶이를 먹으며 대학 때도 여기서 노는 게 아니냐 겁을 냈다. 그중 몇은 지금도 은행동에서 마주친다. 명동스파게티와 신당동떡볶이가 있는 이 만만한 다운타운. 마복림 할머니의 손맛을 점쳐보기엔 역부족인 이곳.
학벌주의를 비판하려면 학벌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고등학생 한나는 모의고사 시험지 채점 안 해보는 자신이 한편 자랑스럽기도 했다. 무엇에든 아득바득 매달리기 싫었다. 잠 오면 자고, 되는 만큼 하고, 바람 불면 맞고 싶었다. 그러나 뭐든 대충일 수 없었다. 이어폰 끼고 나갔다가도 돌아올 땐 이어폰을 빼고 주위를 둘러봐야 했고, 택시기사가 음침한 기색을 드러내면 경계해야 했다. 대학에선 학회장보다 인기 있어도 여학우부장까지만 허락된다는 걸 알았다. 잣대는 강하고 임금은 약했다.
은행동의 익숙함을 저주하던 겨울, 야심 찬 애들은 돈을 쥐어짜 서울로 갔다. 월세로 어떻게 육십만원을 내나 싶었지만, 그 애들은 월세 이상의 가치를 본 것일 테다. 나는 예측 가능한 불운이 좋아 대전에 있기를 선택했다. 서울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나의 여자친구들이 서울의 맛과 멋을 누리는 걸 보면 좋다. 여성청년이 정주하기 좋은 대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돌아온 날에도 나의 여자애들에게는 될 수 있는 한 서울에 가라고 했다. 대전에서 똑같이 청년 활동 십년 해도 남자한테는 정치 하라고 하고 여자한테는 실무 보라고 하잖아요. 여긴 같이 예술 할 사람도 적잖아요. 무조건 가는 게 낫지. 서울에도 가고 이름 모를 나라에도 가. 아예 눌러앉으면 더 좋지.
어떤 의구심도 없이 영어로 말하는 외국인이 뻔뻔스러워 싫은 것과 별개로 나의 여자애들은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다. 아무 때나 떠날 수 있게 채비를 해두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방 사는 여자애들에게는 물을 대어주는 이들이 원체 적으니, 우리는 어떤 자원이든 활용해야 한다. 옷장에 숨겨둔 비상금 훔쳐 서울에 가게를 차렸다 망했다던 옆집 아들처럼. ‘아득바득’이라는 말은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일어나는 사람들을 아니꼬워하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아득바득 살지 말라는 말은 주어진 것 이상으로 바라지 말라는 지시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바라지 않을 수가.
대전의 선화동에는 선리단길이 있고 경주의 황남동에는 황리단길이 있다. 어째서 선화동, 황남동의 무슨 무슨 길이 아니고 사람 좀 모일만 하면 이태원 경리단길의 아류로 만드는 거냐고 비판하면서도, 내 친구들은 경리단길에서 놀았으면 하고 바란다. 서울이 본점이고 지방이 분점이냐고 비판하는 동시에 나의 여자애들에게는 본점에 가라고 속삭이게 된다. 오리지널리티를 느끼기에 여기는 너무 메말랐어. 오리지널리티를 만들기에 여기는 너무 척박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서울에 가세요. 내친김에 서울보다 더 큰 데로 가세요. 유학도 이민도 가고요. 아직 갈 수 있다면 워킹홀리데이도 가고 교환학생도 가요. 갈 수 있는 한 멀리 떠나요.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기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 그래야 클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거나 후회할까 걱정하는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떠났다가 후회되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돌아와서 거기서 본 것들을 이야기해달라고. 우리보다 어린 친구들이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