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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동지, 크리스마스 그리고 팬데믹의 겨울

등록 2021-12-19 20:43수정 2021-12-20 02:31

[뉴노멀-종교] 구형찬 | 인지종교학자

산타클로스가 처형됐다. 일요일 오후 3시, 사람들은 성당의 난간에 산타클로스를 목매달고 화형을 집행했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어린이 250명이 이를 지켜봤다. 1951년 12월23일 프랑스 디종 대성당에서 벌어진 일이다. 주도한 이들은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었고 개신교 교회도 동참했다. 산타클로스의 죄목은 크리스마스의 종교적 의미를 왜곡하고 뻐꾸기 새끼처럼 남의 집에 들어앉아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산타클로스는 어떤 잘못을 저지른 걸까?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런데 사실 예수가 태어난 날은 알 수 없다. 12월25일로 날짜를 정한 것은 로마제국 시대의 일이다. 로마인들이 동짓날에 기리던 ‘무적 태양’의 축제가 예수의 탄생 축일로 대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4세기 말경에는 대부분의 기독교 세계가 이날을 예수 탄생일로 받아들였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동지라는 절기가 있었고, 거기에 로마의 태양신 축제가 자리를 잡았는데, 그 축제의 날을 크리스마스가 대체했고, 훗날 프랑스 사람들은 해마다 이때가 되면 산타클로스에게 열광했다. 그리고 분노한 교회는 산타클로스를 죽였다.

로마제국의 태양신 축제와 크리스마스가 들어앉은 동지는 매력적인 절기다. 동지는 북반구에서 한 해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이 제일 긴 날이다. 하지 이후로 계속 짧아지던 낮의 길이는 동지를 지나면서 다시 길어지기 시작한다.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것이다. 그렇게 동짓날은 소멸과 재생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상상을 자극한다. 동지를 발견한 인류가 그날에 특별한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동지가 문화권마다 다양한 축제와 축일의 계기가 되고 끊임없이 동화와 접변을 겪게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우리에게도 동지 문화가 남아 있다. 당연하게도 동아시아 문화의 주요 전통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조선시대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동지는 ‘작은 설’이다. 사람들은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고, 달력을 찍어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언뜻 보기에 그저 즐거운 축제의 모습이 연상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더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읽어냈다. 따뜻하고 맛있는 팥죽을 쑤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사악함을 물리치려는 주술적 행위였고, 달력과 선물을 나누는 반가운 일도 누군가에게는 역법의 권력과 일상의 위계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동지는 축제만을 위한 절기가 아니다. 동지는 곧 겪게 될 훨씬 혹독한 겨울을 예고하는 날이기도 하다. 동지가 지나면 낮의 길이는 늘어나지만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진다. 추위와 질병에 대한 경계와 예방이 절실한 시기인 것이다. 중국의 <형초세시기>에서 동지는 전염병이 닥쳐오는 시기로 묘사된다. 동짓날에 죽은 공공씨의 아들이 역병을 옮기는 귀신이 되어 동짓날마다 제삿밥을 먹으러 찾아오므로 그가 생전에 싫어했던 팥죽을 쑤어 역신을 물리치게 됐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풍습이 되어버린 북유럽의 동지 민속에서도 동지 이후의 일정 기간을 악령이 특히 활동적인 시기로 여기고, 악령과 싸우기 위해 불을 밝히고 장작을 태웠다고 한다.

축일과 절기에는 절대적인 규범이 없다. 70년 전 디종에서 산타클로스가 처형됐을 때, 시민의 일부는 다음날 성명을 내고 크리스마스이브 오후 6시에 시청에 모여 산타클로스를 부활시켰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선언된 이후로 벌써 두번째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동지는 바로 코앞이다. 감염병 상황은 여전히 심각하지만, 이 축일과 절기를 지내는 방식에 절대적인 규범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시기가 누군가에게는 혹독한 추위와 역병을 이겨내기 위해 힘겹게 싸워야 하는 계절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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