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정치소비자와 시민

등록 2021-12-26 18:08수정 2021-12-26 19:01

[서울 말고]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인터넷은 전라도 땅끝에 사는 사람에게도 세상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아무리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요즘 인터넷을 열면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누구의 부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더라, 누구는 어떤 비리에 연루되었다더라, 누가 오늘 어떤 당으로 갔다더라, 누구와 스캔들이 있던 배우가 어떤 폭로를 했다더라, 누구는 오늘 어떤 말을 했다더라…….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물론, 국민의 알 권리와 한 나라의 최고 권력에 도전하는 정치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정책 대결의 장이어야 할 선거에서 가십만이 난무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파면 팔수록 어떤 비리가 터져 나올지 알 수 없는 대통령 후보나 입만 열면 어이없는 헛웃음을 자아내는 대통령 후보나, 언론에 노출될 때마다 자신의 지지율이 아니라 상대 후보의 지지율을 올려주고 있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유행인 시절이다. 그럼에도 거대 양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은 아이돌의 팬클럽을 방불케 하는 공고한 팬덤으로 진영을 형성하여, 쉴 새 없이 서로 물고 뜯는다. 우리는 연일, 그 어느 때보다도 환멸스러운 정치 행태를 목도하는 중이다.

그러나 수십년간의 양당 정치에 신물이 나고 제3의 정치 세력을 원한다는 사람들이 에스엔에스에 보태는 말들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정치인에 대한 한탄이나 조롱은 아주 쉽고, 제3지대를 구축하기 위해 바닥부터 사회를 만들어 갈 장기적인 정치적 근력은 쉽게 키워지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이 와중에도 다른 목소리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올 한 해 동안 거리와 시설, 쪽방, 고시원 등지의 열악한 거처에서 삶을 마감한 홈리스들을 기억하는 추모제를 지내고, 누군가는 외국인보호소에서 일어난 인권침해를 규탄하는 봉투를 얼굴에 쓰고 행진한다. 누군가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위해 천막을 친 광장을 지키고, 누군가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등의 연내 개·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아침마다 지하철역에 서 있다. 누군가는 죽어간 청소년들을 잊지 않고 ‘현장실습제를 폐지하라’고 외치고, 누군가는 지금이 아니면 내일은 없다며 기후 정의에 입각한 대응 방안을 마련하라고 직접행동을 한다. 누군가는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라고 외치고, 누군가는 정리해고를 철회하라고, 비정규직을 철폐하라고, 일하다가 죽는 사람이 더는 없게 하라고 전국 곳곳에서, 저마다의 자리에서 외치고 있다.

연일 후보들이 쏟아내는 막말과 불거지고 있는 의혹에 대해 누군가는 비판의 이름으로 조롱하고 누군가는 냉소하며 열렬히 정치를 소비할 때, 묵묵히 자기가 선 자리를 지키며 오늘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설 자리를 잃는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우리의 정치를 선거에 가둘 때 민주주의는 무력해진다. 선거로 선출된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지 못하게 만드느냐는 평소 시민들이 어떤 목소리를 조직하고 어떤 목소리에 어떻게 힘을 보태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에스엔에스에 내가 손쉽게 보태는 한마디가 누구의 목소리를 지우고 있는지 생각하는 선거 국면이라면 좋겠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목소리들 외에도 장기화된 코로나 국면에 무너져가는 자영업자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가난한 사람들, 우리 삶과 직결된 수많은 문제를 향한 목소리들에 우리의 목소리를 더하는 연대의 물결이 넘쳐났으면 좋겠다.

선거라는 한철 장사에 우리 자신을 팔아넘기는 소비자가 아니라, 평소 우리의 목소리를 스스로 조직하는 시민의 정치를 위해서 말이다. 우리를 온전히 대변할 스타도 메시아도 없다. 민주주의는 우리를 스스로 구원하려는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